창조방송은 위험하다

[기고] 창조방송은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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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석 희망미디어미래연대 공동대표(전 한서대학교)

창조(創造)의 사전적 의미는 명사로써 ‘전에 없던 것을 처음으로 만듦’이며, 파생어에는 창조되다, 창조하다, 창조적 등 다양한 구조적, 어순적 의미를 가진다. 멋진 단어다. 그렇다면 경제는? ‘인간의 생활에 필요한 재화나 용역을 생산ㆍ분배ㆍ소비하는 모든 활동. 또는 그것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사회적 관계’로 정의한다. 이 역시 멋진 단어다.

우리는 지금 창조경제를 국정철학으로 삼은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다. 창조경제. 멋진 복합명사다. 하지만 멋진 것은 명사일때만 국한된다. 사실 창조경제라는 의미는 복잡하고 추상적이며 다분히 방향성을 상실하기 쉬운 레토직적 구조를 서사화시키고 내면화시키고 있다. 그렇다. 창조경제는 우리가 70년대 ‘잘 살아보세!’를 외치며 전 국민이 삽을 들었던 것과 비슷하다. 다만 당시와 달리 지금은 전 국민이 머릿속에 삽을 들고있는 형세지만. 창조경제는 일차원적인 경제발전논리를 교묘하게 내면화시켜 이를 가다듬고 보완한 1.5세대 테크놀로지의 구현이다. 하지만 창조경제는 개인적으로 나쁘지 않다고 본다. 삽을 머릿속에 박아두면 어떤가. 그 안에서 우리는 각자의 개별적인 창의력을 고양시키고 발전시킬 가능성을 발견한다.

이런식이다. 한 아이가 촛불을 들고 수영장에 들어왔다. 수영장은 물이 많은 곳이다. 촛불 하나로 대규모 화재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게 촛불은 수영장을 비추는 불빛으로서의 역할만 수행하게 된다. 제한적이다. 하지만 아이가 촛불을 인화물질이 가득한 창고로 들고왔다고 생각해보자. 이는 수영장과는 비교할 수 없는 사태를 야기시킨다. 창조경제도 비슷하다. 위험하긴 위험하지만, 이를 전혀 다른 개념으로 환치시킴으로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는 도구다. 잘만 사용하면 긍정적인 대안을 유도할 수 있다. 소년이 인화물질이 가득한 창고가 아니라 차가운 방에 틀어박혀 한 줄기 온기만을 기다리는 독거노인의 집으로 갔다고 생각해 보자. 촛불은 은혜다. 바로 여기에 창조경제의 의미가 있다고 본다. “이걸 단순하게 이렇게 바꾸면 어떻게 될까?” 일차원적인, 혹은 다면적인 좌충우돌식 접근방식이지만 창조경제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질 수 있다. 이러한 방향성을 제대로 잡는다면 아무도 이해하지 못해도, 실제로 그것이 무엇인지 누구도 모른다고 해도 충분한 사태의 동작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결과가 중요한 시대에 살고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창조방송은 결이 다르다. 창조방송은 창조경제에서 모티브를 따왔지만, 사실 탄생하지 말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이유는 간단하다. 창조방송은 경제라는 영역이 허락되지만 방송은 다르기 때문이다. 방송은 인프라며 구축의 마증물이며 인문학의 영역이다. 동시에 철학의 영역이며 사유의 영역이자 구도의 연장선상이다. 순식간에 만들어낼 수 없으며 빠르게 해체할 수 없는 기본적인 인프라. 그것이 바로 방송이다. 창조방송의 폐혜는 여기서 발견할 수 있다. 의미가 추상적이고 모호하다고 해서 그 방향성까지 흐려지는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창조경제가 결과론적 측면에서 실증적인 방안을 도출한다면, 창조방송은 인문학의 영역에 발을 담그고 있기 때문에 쉽게 재단할 수 없는 철학의 사유물로 여겨진다. 그런데 이것을, 창조경제의 발판으로 삼는다? 단언하지만, 창조경제가 성공해도 창조방송은 성공할 수 없다. 방송의 공공성을 담보해야 창조방송의 기본적인 정의가 내려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대한민국의 방송과 언론은 공공성을 논하기 어려운 지경이다.

이런 상황에서 인문학적인, 공리적인 지지대를 바탕으로 창조경제를 설명한다? 불가능하다. 특히 이경재 위원장이 국회에 출석해 창조경제를 한류와 동급으로 여긴다는 발언을 했다고 한다. 불안한 마음이 앞선다. 거대한 틀로 여겨져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패러다임이 단순한 성장 제일주의의 수단으로 전락할 위기가 느껴진다. 창조방송의 정의는 누구도 모른다. 그러나 위험한 것은 사실이다. 삽으로 토대를 다지는 것은 경제의 영역에서 멈추자. 방송의 영역에서 창조를 더해 이를 억지로 구체화시킨 사유의 성과물로 종속한다면 우리에게 닥치는 미래는 재앙뿐이다. 방송은 경제와 작은 교집합을 이루고 있을 뿐이며, 창조방송은 실체가 없어 결과도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