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성ㆍ공익성 개념 훼손에 대한 경계

[기고] 공공성ㆍ공익성 개념 훼손에 대한 경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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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용진 (서강대 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

공영방송의 가치와 책임을 따지는 일에서 공공성, 공익성은 중요한 개념으로 대접을 받았다. 정확한 개념 정의를 둘러싸고 갑론을박하는 일이 지속되었지만 그에 손을 놓지는 않았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공공성, 공익성을 대체하는 개념이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다. 그 개념이 추상적이어서 분석가능하지도 않고, 현실을 점검하는데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는 불만과 함께 제기되었다. 책무성, 공적 책무, 공적 가치가 그를 대체하는 용어들이다. 책무성은 어카운터빌리티로도 불리면서 2000년대 중반 이후로 학문 담론장에서는 꾸준히 연구주제로 각광을 받아왔다. 2004년 영국의 BBC가 제안해 놓은 새로운 지표인 공적 가치도 여기저기서 언급되고 있다.

공공성, 공익성을 책무성, 공적 책무, 공적 가치로 대체한 논의는 일정 내러티브를 갖는다. 먼저 그 개념들의 추상성을 강조한다. 공공성, 공익성의 개념이 추상적이어서 현실을 평가하기엔 적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측정가능하고 현실을 평가할 수 있는 ‘작은’ 개념으로 대체할 필요성이 있음을 강조한다. 작은 개념을 채울 구체적인 지표를 생산해, 체크 리스트를 만들어 현 공영방송을 꼼꼼히 점검한다는 의지를 보인다. 2000년대 중반 이후로 등장한 이 같은 내러티브의 공영방송 정책 논의는 일정 성과를 보이고 있다. 수신료 인상에 몰두한 KBS는 전에 없이 공적 책무라는 용어로 자신의 가치를 공론화하고 있다. 과거에는 없던 개념이고 활용법이다.

추상성을 벗어나 구체성을 보이며 공영방송의 책무를 꼼꼼히 점검하는 일을 반대할 이유는 없다. 다만 그것이 갖는 효과가 애초 의도에서 벗어난다는 점은 지적해야겠다. KBS의 공적 책무 기재부분을 보면 당연히 KBS가 해야 할 구체적인 일을 꼼꼼을 적고 있다. 난시청 지역의 해소나 해외방송에 대한 기여 등을 열심히 언급한다. 하지만 KBS가 보여준 관영적 방송 행태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언급은 어디에도 없다. 수신료 인상을 위해 매진하는 마당에 그 같은 언급을 하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공공성, 공익성에 대한 강조가 전보다 덜 함으로써 공영방송이 갖는 부담의 무게도 훨씬 줄어보였다는 점은 간과할 수 없다. 달리 말해 공공성, 공익성을 책무성, 공적 책무, 공적 가치로 대체함으로써 면죄부를 주는 전혀 엉뚱한 실정적 효과가 생기고 있는 것이다.

발터 벤야민은 근대의 진전을 문명, 인간, 언어의 타락으로 보고, 새롭게 회복할 가능성을 타진하였다. 그가 파리를 응시하며 우울(멜랑콜리)로 설명했던 것도 도시에서 타락을 읽었던 탓이다. 언어철학을 통해 본 그의 생각은 우울해진 삶을 미메시스(mimesis)로 회복하자는 요체를 담고 있다. 신으로부터 언어라는 은총을 부여받은 인간은 애초 신의 말씀에는 못 미치지만 그럴 듯한 언어를 가지고 있었다. 신의 언어가 세상만사를 만드는 창조의 언어였다면 인간의 언어는 창조할 수 없으나 지칭하는 사물과 인연을 맺는 인연의 언어였다. 인간의 언어는 사물에 이름을 부여하며 그 이름은 신의 정신과 인연을 맺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었다. 신의 정신을 사물에 부여하는 일이 바로 인간 언어의 역할이었다.

그런데 어느 틈엔가 인간 언어는 신의 정신과는 거리가 멀어지기 시작했다. 인간 언어는 신의 정신을 담기보다는 자신의 언어 내용을 설명하기 위해 다른 언어를 동원해가는 역사를 벌였다. 이른바 말이 말을 만드는 일이 인간 언어를 지배한 것이다. 벤야민을 이를 인간 언어의 타락이라고 보았다. 인간의 언어 속에서 신의 정신을 읽을 수 없는 언어의 연쇄 시대를 말한다. 그럼으로써 인간의 언어는 사물과의 인연을 끊게 되고 정보의 언어로 바뀐다. 신의 언어가 사물을 창조해내는 창조의 언어였다면 인간의 언어는 타락해서 언어를 양산해내는 이른바 사이비 창조 언어가 되어가고 있었다. 벤야민은 이 순간을 두고 인간이 신으로부터 소외되고, 사물로부터도 소외되며 인간들끼리도 소외되는 때라고 말한다.

추상성을 벗어나 구체성으로 가자며 책무성, 공적 책무, 공적 가치를 만들어낸 과학적 노고를 폄하해선 안되겠다. 다만 그 과학적 노고가 어느 틈엔가 노회한 집단, 권력에 이용당하게 된다는 점도 염두에 두고 경계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싶을 따름이다. 언어를 통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려는 사이비 창조 세력은 끊임없이 ‘만들어 내기’에 몰두한다. 정책 담론에서 올바르고 구체적인 개념 정의에 몰두해 좋은 성과를 내놓으면 단순히 학문의 장에서 무심히 오가는 무가치적 존재 이상이 된다. 전혀 예상치 못한 가치를 창출하고,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곳으로 접합되어서 애초 의도했던 것과는 거리가 먼 활용이 이뤄지기도 한다. 이른바 언어의 타락이 발생한다는 말이다.

정책 연구의 성과가 언어의 타락으로 이어지는 과정은 정책 연구자가 오롯이 책임질 일은 아니다. 정책 연구가 전문 분야로 존재하다 보니 전문가적 둥지 안에서 주고 받는 폐쇄성이 본의 아니게 형성되기도 했다. 특히 방송의 공공성, 공익성 논의는 한정된 전문가에 의해 수행된 흔적을 여기저기서 찾을 수 있다. 그런 조건 하에서 타락의 순간을 포착해내거나 미리 염려하는 일은 쉽지 않다. 정책 연구를 둘러싸고 학술 담론적 협동이 과소했음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정책 철학을 논의하고, 담론의 권력적 실정성(實定性)을 경고하고, 헤게모니를 예지할 협동은 있었어야 했다. 정책 담론 생산자에 비판적으로 다가가는 발걸음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비판적 연구자들의 생산적 비판담론의 생산이 과소했음을 반성하지 않을 수 없다.

영국의 비판적 문화연구 역사는 BBC 철학의 변화와 맥을 같이 한다. 한 때 엘리트주의 문화담론을 펴다, 대중의 담론으로 그리고 헤게모니의 담론으로 이어진 비판적 문화연구는 언제나 BBC의 주요 씽크 탱크였다. 비판적 담론 생산자가 정책 담론과 협동하고 그 정신이 다시 공영방송으로 스며들었던 것이다. 영국의 보수 정치인들이 BBC의 맨 앞 자를 ‘볼세비키’의 약어라고 공격했던 것도 그 맥락이다. BBC가 최고이거나 최선일 수는 없으나 오랜 기간동안 공공성, 공익성의 끈을 놓지 않았던 그들의 끈기를 높이 산다면 언어의 타락을 경험하고 있는 한국으로선 그 협동의 정신을 더듬어 볼 일이다.

협동의 정신으로 이뤄내야 할 일을 미메시스라 부른다. 미메시스는 언어에 담긴 신의 정신을 회복하는 일이다. 원래 신이 계획했던 방식대로는 아니라 할 지라도 시대가 필요로 하는 신의 정신으로 회복하는 일, 미메시스가 공공성, 공익성 논의에서 절실해졌다. 이미 그런 논의를 더 이상 하지 말자는 무리가 등장해 자신의 이익을 취하는 일이 빈번해졌기 때문에 그 절실함은 더하다. 아직 공공성과 공익성은 더 많이, 더 자주 언급되어야 할 가치로 설정하고 그를 더 두텁게 설명하며 그러기 위해 정책 담론 안팎과 협동하는 일을 멈추지 말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