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질 권리 도입? 신중론 대세

잊혀질 권리 도입? 신중론 대세

529

(방송기술저널=백선하) 유럽사법재판소가 ‘잊혀질 권리’를 인정하는 판결을 내리면서 잊혀질 권리의 국내 도입 여부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인터넷 기술의 발달로 개인 정보가 과도하게 노출되고 있는 상황에서 필요성이 충분히 인정된다는 입장과 불법 정보나 사생활 침해 정보가 아닌 정보를 삭제하는 것은 알 권리와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킬 수 있다는 주장이 팽팽히 맞서고 있어 당분간 잊혀질 권리를 둘러싼 논란은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지난 4월 유럽사법재판소는 구글 스페인 검색 결과에서 특정 링크를 삭제하라는 결정을 내리며 ‘잊혀질 권리’를 인정했다. 앞서 스페인에 거주하는 마리오 코스테하 곤살레스는 구글에서 자신의 이름을 검색하면, 16년 전 연금 부담금 미납 때문에 자신의 집이 경매에 넘어갔던 기록이 나온다며, 기사가 작성될 당시에는 사실이었지만 지금은 빚도 모두 갚았고 집도 되찾았다면서 과거 기록을 구글 검색 결과에서 삭제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대해 유럽사법재판소는 “검색 기록이 사실이지만 시간이 지났고, 정보 수집 목적과도 무관하고 과도하다”며 기사의 원문은 유지하되 구글의 검색 결과는 삭제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지난 20여 년간 논란의 대상이었던 잊혀질 권리가 처음으로 인정된 것이다.  

잊혀질 권리(The Right to be Forgotten)는 정보 주체가 인터넷상 자신과 관련된 모든 정보에 대한 삭제 및 확산 방지를 요구할 수 있는 자기결정권 및 통제 권리를 의미한다. 1995년 유럽연합이 개인 정보 처리를 규정하는 지침을 만들면서 처음 언급된 이후 아직까지도 적용 범위를 놓고 이견이 분분하다. 이러한 가운데 유럽사법재판소가 잊혀질 권리를 인정했고, 잊혀질 권리는 순식간에 전 세계적인 이슈로 급부상했다.

   
 

방송통신위원회도 지난 16일부터 17일까지 양일간 서울 양재 엘타워에서 ‘2014 온라인 개인 정보 보호 콘퍼런스’를 개최해 잊혀질 권리의 법제화를 위한 논의의 자리를 마련했다. 이 자리에 참석한 전문가들은 “유럽사법재판소의 판결만으로 잊혀질 권리의 법제화를 논의하는 것은 시기상조”라며 “잊혀질 권리의 개념 정립과 적용 범위, 삭제 판단 주체 등 국내 도입을 위한 명확한 요건을 제시한 뒤 사회적 합의를 충분히 거쳐야 할 사안”이라고 입을 모았다.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콘퍼런스에 참석한 박경신 고려대 교수는 이번 유럽사법재판소의 판결이 매우 잘못되었다면서 “개인에 대한 정보는 과연 그 사람 개인의 것인가”라는 의문을 제기했다. 박 교수는 “잊혀질 권리는 프라이버시와 전혀 무관하게 그냥 단순히 자신이 싫어하는 과거를 타인의 기억으로부터 삭제할 수 있는 권리로 확장되고 있다”며 이번 판결 자체가 개인정보보호법의 입법 취지를 망각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박 교수의 이 같은 우려는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유럽사법재판소 판결 이후 구글이 유럽 거주자들을 대상으로 삭제를 원하는 검색 결과를 접수하는 페이지를 개설했는데, 삭제 요청 접수 중에 가족을 살해하려했던 혐의를 받았던 사람의 삭제 요청까지 있었던 것으로 조사됐다. 이처럼 잊혀질 권리가 범죄 기록 등 자신에게 불리한 정보를 삭제할 수 있는 권리 인정으로까지 확대될 경우 오히려 공익에 해를 끼칠 수 있다는 지적은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도덕적인 딜레마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정찬모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처음 정보가 만들어질 때는 대중의 알 권리나 정보 접근권이 우선되었었는데 시간이 일정 기간 지났다는 이유로 개인의 정보 결정권이 더 중요하게 여겨질 수 있느냐”며 현행법의 운용을 재점검하는 수준에서 대응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주장했다.

이뿐 아니라 일부 전문가들은 “과연 개개인 모두에게 진실된 정보와 그릇된 정보를 정확히 구분해서 삭제를 요청할 능력이 있는지 걱정된다”며 “시간이 흘러 어떤 개인에 대한 정보가 일반 대중에겐 더 의미가 있을 수도 있는데 개인이 삭제를 요청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반문하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보면 국내에 잊혀질 권리를 도입하는 건 아직까지 시기상조라는 입장이 대다수였다. 이미 국내 포털 사이트인 네이버와 다음커뮤니케이션의 경우 잊혀질 권리는 아니지만 명예훼손과 사생활 보호 및 저작권 침해에 국한해 ‘게시 중단 요청 서비스’와 ‘명예훼손 신고 서비스’라는 프로세스를 마련해 적용하고 있기 때문에 잊혀질 권리를 시급히 도입할 필요성은 없다는 것이다. 물론 일각에서는 “이미 과거에도 색인된 정보와 색인되지 않은 정보를 구별해왔다”며 “새로운 프라이버시 침해 환경이 마련되었기 때문에 이번 판결은 균형점을 찾은 의미 있는 판결”이라는 해석도 나오고 있지만 대다수의 전문가들이 잊혀질 권리의 도입에 조심스러운 입장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