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가 허물어지는 AI 시대 ...

[KOBA Daily News] 경계가 허물어지는 AI 시대
부담감을 설렘으로, 기술의 경계를 넘는 서퍼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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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KOBA 2026 Daily News』에 실린 원고입니다.>

[방송기술저널=김상철 CBS 기술국장]

KOBA 2026, 다시 마주한 거대한 물결
2026년 5월, 다시 한 번 방송기술의 현재와 미래를 잇는 KOBA 전시회의 막이 올랐습니다. 매년 이 자리에 설 때마다 우리는 ‘혁신’이라는 단어를 관성적으로 사용해 왔지만, 올해 체감하는 변화의 속도는 과거 그 어느 때보다 매섭고 입체적입니다.

그 중심에는 단연 AI가 있습니다. 이제 AI는 더 이상 전시장의 화려한 데모 영상 속에만 머무는 ‘미래 기술’이 아닙니다. 이미 우리의 제작 현장, 송출 시스템, 그리고 콘텐츠의 문법 자체를 뒤흔들고 있는 ‘현재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화려한 기술적 성취를 자랑하기보다는 최근 겪었던 솔직한 고민과 그 과정에서 얻은 작은 깨달음을 동료 엔지니어 여러분과 나누고자 합니다.

고백: 엔지니어에게 AI라는 ‘부담스러운’ 숙제
얼마 전, CBS에서는 직원을 대상으로 한 ‘AI 집중 교육’이 진행되었습니다. 일주일간 에이전트(Agent)팀과 비주얼(Visual)팀으로 나뉘어 실무에 즉각 투입 가능한 역량을 기르는 고강도 과정이었습니다.

교육 첫날, 수강생들이 돌아가며 자기소개와 각오를 밝히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엔지니어로서 마이크를 잡은 저의 첫마디는 “상당히 부담스럽습니다”라는 고백이었습니다. 그 부담의 실체는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주변의 시선이었습니다. AI가 IT 및 기술적 영역으로 분류되다 보니, 비기술 직군 동료들은 당연히 ‘기술국 엔지니어라면 AI에 대해 이미 전문가일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하지만 엔지니어 역시 매일 같이 쏟아지는 새로운 알고리즘과 모델의 홍수 속에서 매번 학습자의 위치에 서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 기대치가 때로는 무거운 압박으로 다가왔습니다.

둘째는 개인적인 기질 때문이었습니다. 새로운 영역이 나타났을 때 즉각적으로 뛰어들기보다는, 보수적으로 검토하고 시스템의 안정성을 먼저 생각하는 엔지니어 특유의 성향이 저를 머뭇거리게 했습니다. 익숙한 워크플로를 유지하려는 관성이 새로운 파도를 온몸으로 맞이하는 데 걸림돌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부담감을 정면으로 마주하기로 했습니다. ‘부담스럽지만, 최선을 다해 성과를 내보겠다’는 약속과 함께 일주일간의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반전: 기술 너머의 스토리텔링, 아이디어의 힘
일주일 뒤, 결과물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저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제가 마주한 AI의 실체는 제가 생각했던 ‘기술적 영역’과는 결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물론 효율적인 프롬프트를 작성하는 몇 가지 기술적 요령(Tip)은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본질은 따로 있었습니다. 바로 ‘내가 어떤 결과를 원하는가’에 대한 명확한 창의적 아이디어와, 그 결과를 도출하기 위해 AI와 대화해 나가는 스토리텔링의 역량이었습니다.

AI는 완벽한(?) 도구이지만, 그 도구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것은 결국 엔지니어 혹은 제작자의 머릿속에 있는 ‘기획력’이었습니다. “어떤 기술적 엔진을 쓰는가”보다 “이 툴을 사용해 어떤 가치를 만들어낼 것인가”라는 질문이 앞서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단순히 프롬프트 몇 줄 잘 쓰는 ‘기술자’가 아니라, 내가 필요한 툴을 적극적으로 찾아내고 이를 조합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솔루션 설계자’로서의 자세가 더 절실함을 느낀 것입니다.

반추: 반복되는 역사의 흐름, ‘대중화’라는 파도
사실 이런 변화의 충격은 우리 방송 역사에서 처음 있는 일은 아닙니다. 과거를 돌이켜보면 기술의 대중화는 늘 우리 엔지니어들의 자존심과 영역을 위협하며 다가왔습니다.

– 홈레코딩의 등장: 거대한 믹싱 콘솔과 고가의 장비가 갖춰진 전문 스튜디오에서만 가능했던 음반 제작이 컴퓨터 한 대와 인터페이스 하나로 안방에서 구현되던 시절의 충격을 기억하십니까?
– NLE(비선형 편집)의 보급: 수억 원대의 편집기 없이도 누구나 접근 가능한 소프트웨어를 통해 정교한 영상 편집을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편집실의 문턱은 낮아졌습니다.
– 스마트폰과 1인 미디어의 확산: 전문가의 영역이라 믿었던 촬영과 송출이 스마트폰 하나로 가능해지고, 제작자가 직접 카메라를 들고 현장을 누비며 콘텐츠를 완성하는 시대가 왔을 때, 우리는 ‘방송기술의 고유 영역’에 대해 깊이 고민했습니다.

그때마다 기술의 경계는 무너졌고, 누구나 방송 기술의 영역을 넘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AI는 그 ‘대중화’의 정점을 찍고 있습니다. 이제 영상 편집, 그래픽 디자인, 심지어 코딩과 기획까지 AI가 보조하는 시대에 우리는 다시 한번 같은 질문 앞에 서 있습니다.

성찰: 수성(守城)할 것인가, 공세(攻勢)로 전환할 것인가
방송 엔지니어의 전문성은 과연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정해놓은 기술적 바운더리(Boundary)를 견고하게 지키고 성벽을 쌓는 ‘수성’의 자세가 정답일까요?

만약 우리가 기술적 난이도 뒤에 숨어 변화를 외면한다면, AI라는 파도는 성벽을 넘어 우리를 고립시킬 것입니다. 과거 홈레코딩이나 NLE의 도입 때 그러했듯, 기술을 독점하던 시대는 끝났습니다. 이제 방송기술은 엔지니어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창작자가 공유하는 보편적 도구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뼈아픈 고민을 해야 합니다.
“나의 영역을 지키기 위해 노력할 것인가, 아니면 영역의 확장을 위해 나를 변화시킬 것인가?”

결론: KOBA 2026, 수동적인 관찰자에서 능동적인 설계자로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 역시 이 고민에 대한 명쾌한 정답은 알지 못합니다. 이 거대한 전환기의 끝이 어디일지 감히 예단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결론은 내릴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지금과 같은 수동적인 입장으로는 미래의 방송 생태계에서 생존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엔지니어는 시스템의 장애를 막고 유지하는 ‘관리자’의 역할에만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AI라는 무한한 도구 가방에서 우리 조직에 가장 적합한 툴을 골라내고, 그것을 최적화하여 새로운 콘텐츠 가치를 창출하는 ‘적극적인 기술 기획자’가 되어야 합니다. 교육 현장에서 제가 느꼈던 그 ‘부담감’을 변화의 동력으로 삼아야 합니다. 기술적 보수주의라는 껍질을 깨고, 현장의 스토리텔링에 기술의 언어를 입히는 가교 역할을 자처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번 KOBA 2026은 우리에게 단순한 신기술 전시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닙니다. 이곳은 화려한 하드웨어의 향연을 구경하는 곳이 아니라, 우리 각자가 처한 고민을 공유하고 엔지니어로서의 정체성을 새롭게 정립하는 ‘성찰의 장’이 되어야 합니다. 동료 여러분이 마주할 수많은 부스 속에서 우리가 찾아야 할 것은 단순한 스펙 시트가 아닙니다. ‘이 기술이 나의 창의성과 결합했을 때 어떤 새로운 스토리를 만들 수 있을까’를 자문하며 스스로를 자극하는 ‘동기부여의 시간’이어야 합니다.

KOBA 2026의 개최를 다시 한번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변화를 두려워하며 성벽 안에 머물기보다는, AI라는 거친 파도에 기꺼이 보드를 던지고 올라타는 서퍼(Surfer)와 같은 능동성이 우리 모두에게 깃들기를 바랍니다. 부담감을 설렘으로 바꾸고, 기술의 경계를 넘어 새로운 방송의 지평을 여는 길에 CBS 기술국이, 그리고 우리 방송 엔지니어 동료들이 앞장서기를 희망합니다.

함께 고민하고, 함께 도약합시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