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대한민국 UHDTV’

흔들리는 ‘대한민국 UHD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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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옛날 인간은 ‘말’이라는 동물을 만나기 전, 자신이 사는 지역을 거의 벗어나지 못했다. 당연히 인간의 사고는 정체되어 있었으며, 자신이 보고 느낀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인간은 말을 만나고 길들이며 적극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인간의 물리적 속도는 빨라지기 시작했으며 이는 궁극적으로 ‘사고의 속도’가 가속화되는 결론을 낳았다. 말이라는 하드웨어가 인간이라는 소프트웨어와 만나는 순간, 문명은 꽃피우기 시작했다.

UHDTV는 방송기술은 물론, 방송 시장 전반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화두다. 당연하다. UHDTV의 등장은 그저 화질이 좋아진다는 일차원적인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이 말을 타면서 사고의 속도를 끌어 올릴 수 있었듯이, UHDTV는 지금까지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무한한 상상력의 시대로 우리를 인도하기 때문이다. 소프트웨어를 발전의 길로 이끄는 하드웨어의 힘. 혹은 플랫폼이 콘텐츠의 미래를 결정짓는 동력. 일반적인 발전의 범주에서 벗어난 발전의 역사는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세계가 UHDTV에 주목하는 이유다. 하지만 현재 대한민국의 UHDTV는 안녕하지 못하다. 크게는 정부 정책의 난맥상과 어긋난 비전, 작게는 발전의 주춧돌 역할을 해야 하는 기본적인 동력상실이 그 원인이다.

 

   
 

UHDTV의 발전 주체를 두고 논쟁이 가열되고 있다. 현재 방송 정책의 한 축인 미래창조과학부는 방송을 진흥과 부흥의 시각으로만 성급히 재단해 ‘돈을 벌 수 있는 가치’로 모든 가치판단을 내리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대한민국의 UHDTV는 표류하고 있다. 우선 주체의 문제다. 미래부는 UHDTV 발전을 프리미엄 서비스로 인식해 유료방송 중심으로 진흥전략을 짜고 있다. 이 과정에서 노골적인 밀어주기 정황도 드러난다. 방송산업발전 종합계획의 큰 틀 안에서 유료방송 UHDTV를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한편, 산하 연구기관인 TTA는 석연치 않은 이유로 지상파 UHDTV 표준모델을 기술보고서로 하향 채택했다. KBS를 중심으로 지상파 UHDTV가 보편적 고품질 미디어 서비스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음에도, 미래부의 이해하지 못할 고집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게다가 대한민국 방송 콘텐츠의 80%는 지상파를 통해 제작되고 있다.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

물론 미래부도 할 말은 있다. UHDTV는 유료방송 중심으로 추진되어야 현 정부의 국정철학인 창조경제와 짙은 교집합을 구성할 수 있다는 것. 그러나 이는 명백한 종합편성채널 특혜인 8VSB 허용 등으로 콘텐츠 산업의 붕괴를 야기시키는 정책을 구사하는 미래부가 할 말은 아닌 것 같다. 게다가 UHDTV를 특정 시청자를 위한 프리미엄 서비스로 육성하는 방안이 대승적이고 공공적인 인식에서 한참이나 벗어났다는 점도 지적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유료방송 중심의 UHDTV 발전이 산업발전의 낙수효과를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헛된 믿음도 문제다. 이것은 최근 프란체스코 교황이 ‘복음의 기쁨’을 통해 경제적 낙수효과를 비판한 것으로 대체한다.

하지만 정부 정책의 난맥상 외에도 대한민국 UHDTV를 위협하는 요인은 많다. 그중에서도 국산 장비업체의 UHDTV 기술이 제로에 가깝다는 점이 문제다. 얼핏 들으면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삼성전자와 LG전자의 UHDTV가 막강한 기술력을 바탕으로 세계를 호령하는 마당에 이건 무슨 말인가? 여기에는 함정이 있다.

   
 

우선 국내 제조사들의 UHDTV의 기술력이 세계 수준이라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점점 보급화의 흐름을 타기 시작한 UHDTV 가격이 일종의 변수로 부상하는 가운데, 저렴한 가격을 무기로 시장을 잠식하기 시작한 중국의 파상공세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여담이지만 삼성전자가 선보인 세계 최대 110인치 UHDTV의 패널은 삼성 디스플레이의 제품이 아니라 중국 BOE의 제품이다) 또 HDTV 시장에서 대한민국에 밀린 일본의 앞선 UHDTV 기술력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국내 제조사들은 UHDTV 시장에서 흔들림 없는 경쟁력을 무기로 삼고 있으나, 중국과 일본 등 각 나라들이 저렴한 가격과 막강한 기술력을 바탕으로 국내 제조사의 입지를 흔드는 점은 시한폭탄으로 여겨진다. 여기에 싱클레어 방송그룹을 필두로 하는 미국의 존재도 변수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디스플레이를 제외한 다른 UHDTV 영역에서 대한민국의 기술력은 존재조차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즉 수상기 기술은 삼성전자와 LG전자라는 양대산맥이 기술의 발전을 견인한다고 해도, UHD를 제작할 수단에 있어 대한민국은 명함도 못 내밀고 있다. 당장 올해부터 UHDTV 방송과 영화가 본격적으로 제작될 것이 확실한 상황에서 UHDTV 카메라와 편집기, 저장기, 심지어 소소한 마이크 하나도 국산 제품이 없다는 것은 충격적이다. 실제로 최근 막을 내린 CES에서 일본의 소니는 UHDTV 4K 워크플로우를 통해 카메라와 편집기, 송출기를 아우르는 막강한 라인업을 구축했으며 할리우드 제작사의 단골 장비업체인 레드도 성능을 대폭 개량한 UHDTV 카메라를 출시했지만 국내 장비업체는 잠잠하기만 했다. 현재 대한민국 UHDTV는 총체적 난국이다. 막강한 콘텐츠와 플랫폼 가능성을 타진하는 지상파는 정부의 정책에서 의도적으로 배제되고 있으며, 심지어 근간을 이루는 장비업체의 부재는 심각한 문제로 여겨진다. 당장 UHDTV 제작 시스템의 안착으로 기존 방송 장비의 교체가 빠르게 이뤄진다면 장기적으로 엄청난 후폭풍이 일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정부는 귀를 닫고 있다. 심지어 모바일 광개토 플랜 2.0과 전파진흥기본계획을 통해 지상파 UHDTV의 재원인 방송용 필수 주파수만 박탈할 뿐이다. 방송과 주파수의 민영화, 아니 사영화의 차원에서 지상파는 고사 직전이며, 그 과정에서 대한민국 UHDTV는 표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