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라밸

[칼럼] 워라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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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기술저널=오건식 SBS 인사팀부 국장] 요즈음 회자되는 단어로 ‘워라밸’이 있다. Work와 Life의 Balance를 뜻하는 것으로, 일하는 것과 삶을 즐기는 것의 조화를 추구하라는 의미라고 한다. 어디에서는 ‘워라벨’이라고 하지만 ‘밸런스’란 표기를 생각하면 ‘워라밸’이 맞는 표현일 것이다. 갑툭튀 신조어 같지만 이미 1970년대 영국에서 만들어진 단어라고 한다. 어려서부터 들어온 문구인 ‘일할 때 일하고 놀 때 놀아라’가 영국에서도 그땐 유행이었나 보다.

요즘 이 단어가 다시 등장한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SNS 등을 통해 24시간 업무 지시나 보고가 가능해짐에 따라 일할 때와 놀 때의 구분이 모호해져서가 아닐까 한다. 클럽에서 띵까띵까 놀고 있는데, 팀장이 ‘내일 회의 시에 무엇무엇에 대해서 논의합시다’라고 톡을 날리면 걍 내일 무엇무엇에 대해 논의하자는 것이지 무엇무엇에 대해 알아보고 오라는 지시는 아니라고 생각할 흙수저가 과연 있을까?

‘워라밸’ 이 단어에는 Work의 상대 개념으로 Life가 자리하고 있다. 어떻게 생각하면 Work의 대치되는 개념이 Life인 것이다. 즉, 일만 하는 것은 삶이 아닌 것이다. 그야말로 ‘저녁이 있는 삶’을 추구하자는 이야기다. 물론 클럽의 ‘Happy Hour’에 홀린 것이 아니라면 저녁에 가지는 않겠지만. 방송사 초년병 시절, 선배 중에 수행하던 프로젝트의 프로그램 버그를 잡으려고 코딩 출력물을 챙겨서 신혼여행에 가져간 선배가 있었다. 그것도 무려 132컬럼짜리 프린터 용지 무더기를 편철해 가지고. 직장 상사에게 ‘결혼 좀 하고 오겠습니다’라고 하는 것보다 진일보한 Trend Leader였던 것이다. 아~ 서 선배.

얼마 전 KT 아현지사의 화재가 통신 대란까지는 아니라도 중란 정도는 일으킨 것 같다. 카드결제가 안돼서 생수 하나 사 먹을 수 없었다는 소비자의 하소연부터, 카드 결제 손님을 받을 수 없어서 장사 망쳤다는 상인의 목소리까지 피해자가 속출했다. 해외여행 시 어떤 나라는 결제 시 카드를 잘 안 받고 현금으로 지불해야 한다며 무슨 미개한 나라 취급한 적이 있을 것이다. 언론에서도 이를 질타하는 목소리가 자욱하다. C급은 돼야 할 보안 시설이 D급으로 분류된 제도의 문제라느니, 5G 시대를 맞이하는 형국에서 나라 망신이라느니 하면서.

그러나 방송기술계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통신 회선과 데이터 서버 복구를 위해 KT 및 관련 업체 엔지니어들이 몇 날 며칠을 유독가스가 덜 사라진 공간에서 복구를 위해 힘들었을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리다. 방송과 통신이 사이가 안 좋은 것 같지만 사실은 동병상련의 처지다. 방통융합이 돼서인지 아픔도 융합이 된 것일 것이다. 특히 엔지니어들의 세계에서는.

방송국 간 네트워크나 중계방송용 회선 계약 시 한 푼이라도 절감하라는 윗선의 하명을 받고 통신사분들께 금액을 좀 더 줄여달라고 강력한 요구를 했던 기억들이 새롭다. 방송사가 회선료를 현실화(?)해서 냈다면 통신사가 좀 더 시설 보안에 투자했을 텐데.

원인 등과는 별개로 아현지사 시설 복구에 투입된 KT 및 관련 업체 엔지니어들의 노고에 심심한 감사를 드립니다. 그들의 워라밸도 조속히 복구되기를 바랍니다. 방송사고 특히 무인화 시설에서 송출이 안 되는 경우, 어둠 속에 산을 오르는 방송기술 엔지니어의 모습과 오버랩이 된다. 이렇게 엔지니어들에게는 아직은 지켜야 할 Work가 더 많아 보인다. 그 어느 직군보다 워라밸을 추구하기 어려운 직종이다. 그래서 꼭 뭐 ‘위험수당’에 해당하는 항목을 더 고려해달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비용 절감을 위한 과도한 자동화는 구성원의 워라밸에 중대한 위험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라는 공익광고성 멘트를 날리고 싶을 뿐이다.

봐도 3분이면 다 훑어보고 걍 비치해 두면 좀 폼이 나던 잡지, LIFE지가 폐간된 지 벌써 10년이 넘었다. LIFE지에 근무하던 사람들의 워라밸은 어떠했을까? 그들은 Work가 LIFE라서, 즉 극한직업이라서 사라진 것이 아닐까 하는 쓰잘데없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