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세상 홋카이도에서의 스노보딩과 일본대지진

눈 세상 홋카이도에서의 스노보딩과 일본대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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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대호 아리랑국제방송 차장

스노보딩(Snowboarding) 시즌 생활을 접은지 4년이 지나고 봄이 오는 즈음에, 아는 형님과 함께 파우더 스노보딩을 하러 일본으로 향한다. 이번 여행으로 스노보딩 원정 7회차(뉴질랜드 3회, 일본 4회)로 접어드는데, 스노보딩 원정여행은 그저 아무 생각없이 보딩하고 식사하고 온천하고 밤에 쉬는 아주 간단한 일정이기에 푹 쉬고 즐기기에는 최고인 여행이다. 또한, 이러한 여행을 즐길 수 있을 만큼 스노보딩 스킬을 높이고 투자한 내 자신에 뿌듯하기도 하다.

전세계적으로 알프스라고 불리우는 곳이 세 곳이 있는데, 유럽의 알프스와 서던(Southen) 알프스라 불리우는 뉴질랜드 알프스, 그리고 일본 혼슈 지방 도야마(富山)부터 나고야(名古屋)까지 이르는 재팬 알프스가 그곳이다. 이 3천미터급 준봉들에 쌓인 눈(雪)은 우리가 흔히 접하는 스키장의 눈과는 질적으로 다른 파우더 스노우(powder snow, 粉雪)이다. 파우더 스노우란 습기가 많지 않고 가벼운 눈으로서, 스키를 탈 때 푹신하고 부드러워 빠른 속도를 내게 한다. 그런데 위의 세 곳보다 높이는 낮지만 파우더 스노우가 많이 쏟아져서 전 세계의 스키어와 보더들이 파우더를 즐기기 위해 가장 많이 찾는 곳이 있는데, 그곳이 이번에 내가 찾은 홋카이도(北海島)다. 일본에서 가장 고위도에 위치한 홋카이도는 동해와 오호츠크해에서 습기를 머금고 넘어온 편서풍이 높은 준봉들에 걸려서 눈으로 내리기 때문에 눈 많은 곳으로 치자면 세계 제1일 것이다.

▲ 홋카이도 파우더 스노우 위에 선 필자

마일리지를 이용하려다 보니 일정이 나오는 곳이 이곳뿐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이 결정으로 대재앙 일본대지진을 피할 수 있었기에 천운이 아니었을까? 일본대지진(3월12일)이 발생하기 이틀전인 3월 9일, 홋카이도 신치토세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외교부에서 “일본 동북지역 쓰나미발생”이라는 문자가 왔다. 하지만 뉴스를 보니 별 피해가 없는 듯 잠잠했고 일행은 일정을 소화하기로 했다.

우리가 갈 스키장은 니세코 안누푸리산에 위치한 니세코 스키장인데, 홋카이도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눈이 많이 오는 곳으로 신치토세 공항에서 두시간반을 버스를 타고 들어가면 도착할 수 있었다.
다음날, 베이스에서 리프트를 타고 대략 40분이 걸려서 올라간 마운틴 탑엔 엄청난 바람과 눈보라가 고글을 때려 시야확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일행과 함께 천천히 시야확보 되는 곳까지 슬라이딩으로 미끄러져 내려오니 눈이 얼마가 쌓였는지 조차 모를 정도로 온세상이 하얗다. 나는 신나게 보딩하기 시작했다. 보통 잘 모르는 스키장에선 다른 스노보더들을 따라가는게 팁이다. 하지만 아뿔사! 잘 모르던 루트에서 밸런스를 놓쳐 넘어졌는데 눈 높이가 허벅지에 이르렀다. 일어나려고 했지만 눈속에 데크가 쳐박혀 도저히 일어날 수 가 없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나뿐만이 아니라 많은 보더들이 넘어져서 일어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눈높이가 허벅지에 이를지라도 산의 경사가 높다면 미끄러져 내려올 수 있지만, 이곳은 경사가 약해서 걸어 나갈 수 밖에 없어서 더욱 힘들었다. 길을 모르는 스노보더들을 따라간게 화근이었다. 깊게 쌓인 눈더미로부터 안간힘을 써서 빠져나오는데 1시간이 넘게 걸렸고 그 사이 이미 체력은 바닥이 나버렸다. 결국 그날 오후는 스트레칭 분위기의 가벼운 라이딩과 파우더 스노보딩 연습으로 일정을 소화했다.

▲ 급경사와 많은 눈 때문에 멈춰선 필자

다음날 (3월11일) 본격적인 파우더를 즐기기 위해 다시 정상으로 오르는데, 나는 그제서야 리프트 앞에 “expert only, ungroomed snow (손질하지 않은 눈길이니 전문가만 이용하세요)”라고 적힌 표지판을 봤다. 일행과 난 잠시 망설이며 도전이냐 포기냐를 고민하다가 결국 리프트에 올랐고 다시 산정상에 섰다.
나무 한그루 안보이는 하얀 산! 내려갈 루트를 살피고 과감하게 도전하고 최대한 후경으로 내려가는데 가슴으로 올라오는 전율을 느낀다. 무릎까지 쌓인 눈을 헤치고 가르는 보딩, 시원한 시야, 하얀세상 그리고 어제의 좌절을 극복해 낸것같은 자신감! 산중턱에 내려오니 여기저기 숲이 보이고, 이제 트리런(tree run) 차례다. 트리런이란 나무 사이로 스노보딩을 하는 것인데 위험하기도 하지만, 재미가 최고다.

오후 다섯시쯤 라이딩을 끝내고 내려와 TV를 틀었는데 모든 채널이 NHK 방송을 방영하고 있었다. 일본 동쪽 해안에서 발생한 지진과 쓰나미 때문에 일본 전체가 국가비상체제에 돌입해 있었고 방송 또한 재난방송체제로 돌아선 상태였기 때문이다. 핸드폰 문자를 확인하니 ‘오후 3시49분 일본동부지역 지진발생’이라는 문자가 도착해있었다. 스마트폰을 이용해서 한국상황을 체크하고, 일본뉴스에서 쏟아지는 재난방송을 모니터링 했다. 말 그대로 대재앙 수준의 쓰나미였다.

▲ 일본TV에서 재난방송을 실시하고 있다.

우리는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고 부랴부랴 카카오톡(스마트폰 SNS 어플) 프로필을 “홋카이도 현재 안전 이상무”로 바꾸어 우선 우리의 신변이 안전함을 알렸다.
뉴스를 보니 타지역의 여진은 계속 되지만 다행스럽게도 홋카이도 쪽은 침수나 여진에 의한 피해가 적었다. 하지만 연이어 원전 방사능 유출 보도가 나오면서 방사선과 낙진이 홋카이도까지 올라오면 어쩌나라는 걱정이 앞섰다.

원래는 다음 날 일정 역시 스노보딩이었다. 하지만 일본 현지의 이런 분위기 속에서 스노보딩을 하는 건 좋을 것이 없다고 판단하고, 결국 한국에 가는 게 최우선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당장 현지숙소를 캔슬하고, 공항 근처의 숙소를 예약했다. 그리고 버스를 타고 신치토세 공항으로 갔는데, 이곳은 생각 외로 평온했다. 우리는 공항 근처의 숙소에서 뉴스를 보며 지진과 쓰나미에 따른 상황을 모니터링하며 하루를 보내고, 예정대로 3월13일 한국행 비행기에 오르면서 스노보딩 원정을 마쳤다.

월요일에 출근하니 여행사에서 전화가 왔다. 동북3현(Japan Alps) 쪽으로 스키여행을 갔던 사람들은 리프트가 멈추거나 숙소가 정전되고 급기야는 한국에 들어오는 것까지도 쉽지 않다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그쪽으로 여행을 가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천운에 감사드리면서, 대재앙의 한가운데서 체험한 자연의 경이로움에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인다. 마지막으로 이번 참사를 겪은 이들에게 애도를 표하고, 현지 교민과 유학생들의 안전에도 이상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