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배구조를 넘어 공공서비스미디어(PSM) 체제로 ...

[칼럼] 지배구조를 넘어 공공서비스미디어(PSM) 체제로
디지털 시대 공영방송의 정당성과 지속 가능한 혁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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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기술저널=박종원 전 KBS춘천방송총국장, 정책학 박사] 공영방송의 지배구조를 개선하는 개정 방송법(방송 3법)의 시행에 따라 MBC와 EBS의 사장 선임 절차가 본격화되고 있다. 야당 추천 몫을 제외한 방송문화진흥회와 한국교육방송공사의 이사 선임이 일단락되면서, 새로운 이사진들은 법률이 규정한 절차에 따라 신임 사장 공모를 진행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 공영방송의 맏형 격인 KBS의 상황은 여전히 답답한 교착 상태에 머물러 있다. KBS 사측은 개정 방송법에 명시된 임직원(3명)과 시청자위원회(2명)의 이사 추천을 위한 필수 전제 조건인 사내 편성위원회 구성을 두고, 다양한 이유를 들어 시간 끌기로 일관하고 있다. 개정 법률의 입법 취지와 허점을 교묘히 이용하며 사장 선임을 위한 정상적인 이사 추천을 지연시키고 있다. 심지어 박장범 KBS 사장은 방송법 개정에 따라 신임 사장 선임을 진행하는 이사회를 상대로 하는 ‘이사회 결의 효력정지 가처분’을 법원에 신청했다(미디어스, 2026). 물론 일각에서는 개정된 방송법에 따른 공영방송 현직 사장의 임기 중단을 두고 공영방송의 독립성 침해를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공영방송의 지배구조 설계와 사장 선임 방식은 방송의 자유(헌법 제21조)를 구체화하기 위한 국회의 본질적 입법 사항으로서(의회유보 원칙), 국회가 입법권을 통해 거버넌스를 개편하는 것은 정당한 헌법적 권한 행사로 평가된다. 더욱이 사장이 방송법의 의무인 노사 동수 편성위원회(또는 편성규약 제·개정 절차) 구성을 일방적으로 해태하며 이사 추천을 지연시킨다는 비판을 받는 상황에서, 사측이 공영방송의 독립성을 명분으로 내세우는 것은 설득력을 갖기 어렵다.

공영방송은 단순한 언론 사업체가 아닌, 다양한 사회적 세력의 합의를 바탕으로 한 사회적 제도이며, 건강한 여론 형성을 통해 민주주의 질서를 지탱하는 핵심축으로 작용한다. 정치 종속적 이사회에서 정치 중립적 이사회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거버넌스 개편은 공영방송 혁신을 위한 ‘중대한 시험대이자 출발점’이다. 전파의 시대를 지나 글로벌 미디어와 알고리즘이 지배하는 디지털 환경 속에서, 공영방송은 어떤 존재 이유와 제도로 스스로 증명할 것인가? 공영방송의 진정한 혁신은 방송사 내부의 신뢰 회복과 개혁을 전제로 한다. 공영방송 스스로 시청자의 접점을 확대하고 디지털 콘텐츠 생산과 설명책임을 강화하는 노력과 함께 공공서비스미디어(PSM)의 비전에 대한 제 세력 간의 사회적 합의를 바탕으로 제도 개선이 이루어져야 한다.

지난 호에서 다룬 차별적 공공 규제 철학의 정립과 공영방송의 내부 혁신에 이어, 이번 호에서는 전통적 공영방송(Public Service Broadcasting, PSB)을 넘어 모든 디지털 영역을 포괄하는 ‘공공서비스미디어(Public Service Media, PSM)로의 체제 전환’, 그리고 이를 지탱할 공적 책무의 구체화, 보편적 접근성 보장, 시민 참여 거버넌스, 공적 재원의 현대화, 성과 연계형 협약·허가 체계를 중심으로 지속 가능한 제도 혁신 방안을 살펴보고자 한다.

미디어 환경의 격변과 유럽 PSM의 전환
미디어 환경의 디지털화와 글로벌화는 공영방송에 새로운 정체성과 정당성을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 아날로그 주파수의 희소성에 기반했던 방송 독점 시대는 이미 끝났기 때문이다. 디지털 다채널의 폭증과 초고속 인터넷망의 보편화는 누구나 저비용으로 미디어를 생산·유통할 수 있는 환경을 열었다. 유튜브와 넷플릭스 등 글로벌 거대 플랫폼 기업들이 압도적 자본력을 바탕으로 콘텐츠 시장의 우월적 지위를 점하고 있다. 오늘날 BBC의 최대 경쟁자가 상업 미디어가 아닌 넷플릭스와 유튜브인 것처럼, 공영방송은 무한경쟁의 디지털 플랫폼 생태계에서 ‘수많은 미디어 중 하나(one of them)’로 전락했다.

다채널·모바일 환경은 시청자의 시청 패턴과 커뮤니케이션 양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수용자들은 더 이상 편성표에 머물러 있는 수동적 존재가 아니며(Ewing & Thomas, 2006), 전통적인 일방향·하향식 커뮤니케이션 모델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Jakubowicz, 2010). 알고리즘에 기반한 파편화되고 개인화된 미디어 소비는 개인의 선택권을 넓힌 측면이 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확증 편향을 낳고 사회적 소통을 단절시키며 공동체의 유대감을 약화시키는 부작용을 초래하고 있다(KBS 미래특별위원회, 2020). 이러한 환경 변화 속에서 유럽의 공영방송사들은 이미 20여 년 전부터 정당성 확보를 위해 선제적으로 대응해 왔다. 2007년 유럽평의회(Council of Europe) 권고를 기점으로, 유럽은 전파 기반의 공영방송(PSB)을 인터넷, 모바일, 양방향 서비스를 포괄하는 공공서비스미디어(PSM)로 재정의하고 법제화했다.

미디어 학자 야쿠보이츠(Karol Jakubowicz, 2007)는 PSM을 ‘PSB + 모든 관련 플랫폼 + 웹 2.0’으로 요약하며, 방송통신 융합 환경에서 공적 서비스를 가장 잘 전달할 수 있는 기술 중립적 소관 업무로 정의했다. PSM은 결국 라디오와 텔레비전에 국한되던 ‘방송(B)’의 개념을 모든 매체의 공공서비스를 뜻하는 ‘미디어(M)’로 대체하는 것이다. 시청자와의 공동창작과 쌍방향 소통을 확대하며, 문화적 다양성과 사회통합, 지식 시민권에 기여하는 것이 PSM의 본질이다(Burri, 2015; Donders, 2021).

유럽방송연맹(EBU)은 공영미디어가 지속가능성을 유지하기 위한 6대 핵심 가치로 보편성(Universality), 독립성(Independence), 탁월성(Excellence), 다양성(Diversity), 책임성(Accountability), 혁신성(Innovation)을 제시하고 있다. 지상파 플랫폼의 전통적 역할을 바탕으로 인터넷과 개인화 서비스로 영역을 확장하되, 알고리즘과 상업 세력에 휘둘리지 않는 신뢰와 품질의 기준을 세우는 것이 유럽 PSM 전환의 핵심이다. 공영방송과 공공서비스미디어의 특징을 비교하면 아래 표와 같다.

표. 공영방송과 공공서비스미디어의 특성 비교

한국 공영방송의 지체된 현실과 전환의 한계
유럽이 PSM으로 진화하며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정당성을 확보하는 동안, 한국의 공영방송 제도는 지난 20년간 깊은 정체와 퇴행을 겪었다. 세계 최고 수준의 인터넷 속도와 스마트폰 보급률, 높은 유료방송 가입률 속에서 국민의 미디어 이용 행태는 어느 나라보다 빠르게 디지털로 이동했으나, 공영방송을 규율하는 법과 제도는 낡은 틀에 갇혀 있었다. 이러한 지체의 배경에는 정치 종속적 지배구조와 취약한 공적 재원이 자리 잡고 있다. 일부 정권이 바뀔 때마다 공영방송은 전리품처럼 다루어졌고, 낙하산 사장 임명과 제작 자율성의 침해, 이에 맞선 파업의 악순환이 되풀이되었다. 이명박 정부의 종합편성채널 도입과 윤석열 정부에서 자행된 일방적 사장 해임과 수신료 분리징수 시행령 개정은 공영방송의 공적 기반을 크게 훼손했다. 문재인 정부도 지배구조 개혁의 골든타임을 실기하면서 공영미디어 체제로의 전환이 지체되었다.

방송법상 공영방송에 대한 명확한 법적 정의조차 부재한 상태에서, 공영방송은 민영방송 및 종편과 차별화되는 공적 규제를 적용받지 못했다. 45년간 동결된 기형적인 수신료 제도와 설상가상의 전기료 분리징수로 인한 재정 악화로 공영방송은 혁신의 동력을 상실했다. 이제 개정 방송법을 통해 정치 종속적 지배구조에서 정치 중립적 지배구조로 전환할 수 있는 제도적 여건이 마련된 만큼, 지배구조의 안착을 넘어 공영방송은 신뢰 회복, 내부 혁신, 그리고 공영방송(PSB)을 공공서비스미디어(PSM) 체제로 전환하는 지속 가능한 제도 혁신에 나서야 할 때다.

지속 가능한 공영미디어(PSM) 제도 혁신의 핵심 과제
민주주의 질서의 핵심적인 제도인 공영방송의 제도 혁신은 방송사 내부의 자구 노력만으로 완결될 수 없으며, 국민과 시민사회, 학계, 정부와 국회 등 제 세력 간의 폭넓은 사회적 합의가 수반되어야 한다. 사회적 합의를 바탕으로 공적 책무, 보편적 접근성, 시민 참여 거버넌스, 재원, 평가 및 허가 체계가 하나의 유기적 시스템으로 맞물려 돌아가야 한다. 공영미디어는 여러 중대한 과제에 직면해 있다. 외부 압력으로부터 그 가치와 독립성을 어떻게 수호할 것인가? 새로운 미디어 플랫폼에서 어떻게 성공할 것인가? 특히 젊은 시청자들에게 어떻게 계속해서 의미 있는 존재로 남을 것인가? 시청자의 신뢰를 어떻게 얻고 유지할 것인가? 어떻게 정당성과 대중의 지지를 얻을 것인가?(EBU, 2012). PSM 체제 전환을 위한 공영미디어와 우리 사회의 과제는 다음과 같다.

첫째, 신뢰 회복과 내부 개혁을 전제로 지속 가능한 공영미디어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는 것이다. 공영방송 제도 혁신의 출발점은 철저한 자성에서 비롯된 신뢰 회복과 과감한 내부 개혁이다. 공영방송 스스로 정파성을 탈피하고 전문직주의에 입각한 공적 책임을 다할 때 비로소 사회적 설득력이 생긴다. 이러한 신뢰를 기반으로 “상업 미디어가 범람하는 시대에 공영방송이 왜 여전히 필요한가?”에 대한 제 세력 간의 사회적 합의가 도출되어야 한다. 시장 논리에만 맡겨진 미디어 환경에서는 상업적 수익성이 낮은 심층 탐사보도, 고품격 다큐멘터리, 순수 문화예술, 어린이 교육, 지역 및 소수자 콘텐츠가 과소 공급될 수밖에 없다. 상업 플랫폼의 알고리즘이 확증 편향과 사회적 파편화를 조장할 때, 여론 왜곡과 사회 분열이 가속화되는 미디어 환경에서 엄격한 게이트키핑과 팩트체크를 거친 객관적이고 정확한 뉴스를 전달하는 공영미디어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졌다. 양극화되고 분절화되는 시대에 사회가 안정적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갈등을 완화하고 다양한 의견과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가 온전히 표현되는 공론장을 보장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공적 가치와 PSM의 미래 비전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있을 때 제도 개선과 공적 재원 지원의 정당성이 확보된다.

둘째, 공영미디어(PSM)의 법적 정의를 마련하고 보편적 접근성(Universality)을 확립해야 한다. 공영방송에 요구되는 아날로그 시대의 ‘보편성’ 개념을 탈피하여, 디지털 시대의 기술 중립적인 공영미디어(PSM) 책무 체계로 개편해야 한다. 특히 디지털 시대의 보편성은 물리적 송출망을 넘어 ‘접근 보편성’과 ‘보편적 발견성’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급변한 미디어 이용 환경 속에서 공영방송 단독의 지상파 방송망으로 보편적 접근권을 보장하는 것은 구조적 한계에 직면했다. TV 수상기뿐 아니라 온라인, 모바일, OTT 등 모든 디지털 플랫폼에서 국민 누구나 추가 비용 없이 공익 콘텐츠를 이용할 수 있도록 ‘디지털 보편적 서비스’ 의무를 명시해야 한다. 아울러 유럽과 같이 스마트TV OS, 포털, 앱 마켓 등 주요 게이트웨이에서 수신료 기반의 공공 콘텐츠가 우선적으로 노출·추천될 수 있도록 ‘보편적 발견성(Prominence)’을 법제화하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장애인과 고령층 등 디지털 소외 계층의 접근권을 포괄하는 보편성 보장은 상업적 알고리즘의 편향으로부터 시민의 기본권을 지키는 핵심 안전장치다.

셋째, 시청자 주권을 실질화하는 개방형 시민 참여 거버넌스 구축이다. 공공서비스미디어는 정부나 시장이 주도하는 기구가 아닌 ‘시민사회의 프로젝트’(Donders, 2021)다. 과거 아날로그 시절의 일방적·계몽적 방식을 벗어나, 시민이 미디어의 단순한 소비자에 머무르지 않고 기획, 제작, 평가의 주체로 직접 참여하도록 해야 한다. 현대 민주사회에서 시민은 공영미디어가 어떻게 조직되고 운영되는지, 자금이 어떻게 사용되는지, 그리고 저널리즘 활동이 어떻게 수행되는지에 대해 알 권리를 가진다. 덴마크, 스페인, 스위스 등 유럽 주요 공영방송은 독립적인 옴부즈맨이나 ‘시청자 권익 옹호자(Audience Editor)’ 제도를 도입하여, 시민의 비판과 제안을 상시 수렴하고 제작 가이드라인 위반을 독립적으로 조사·권고하는 자율적 평가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다(EBU, 2012). 이러한 방식으로 공영미디어 조직의 투명성과 설명책임(Accountability)을 획기적으로 높여야 한다.

넷째, 공적 책무 수행을 위한 수신료 제도의 현대화다. 안정적인 공적 재원의 뒷받침 없는 공영미디어의 혁신은 공허하다. 45년 동안 2,500원에 묶여 있는 수신료 제도를 디지털 환경에 맞게 현대화해야 한다. TV 수상기 등록제라는 낡은 부과 방식을 벗어나, 독일이나 스위스처럼 모든 시민이 디지털 공공 인프라를 유지하는 비용을 공동 분담하는 ‘공영미디어 분담금’ 체계로의 전환을 검토해야 한다.

다섯째, 성과 연계형 평가 및 ‘공영미디어 협약(Charter)’ 허가 체계로의 전환이다. 공영방송에 대한 규제 방식을 기존의 형식적인 지상파 재허가 심사에서 탈피하여, 사회적 계약에 기반한 ‘공영미디어 협약(Public Service Charter) 제도’로 전환하는 방식이다. 영국의 BBC 칙허장 모델처럼 규제기관과 공영미디어가 5~7년 단위로 중장기 공적 책무 목표, 디지털 서비스 범위, 소요 재정 규모를 명시한 공적 협약을 체결하는 형태다. 다만, 협약 제도는 현재의 허가제보다 강력한 규제 방식이기 때문에, 정부의 규제와 간섭으로 공영미디어의 독립성이 훼손될 수 있는 치명적 위험이 공존한다. 따라서 협약 제도는 ‘정치적 독립성 보장’과 ‘수행 책무에 상응하는 공적 재원(수신료) 보장’이 전제될 때에 한하여 추진되어야 한다. 독립된 평가기구를 통해 사회 갈등 해소 기여도, 보도의 신뢰성 및 공정성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하여, 그 결과를 면허 갱신 및 차기 공적 재원(수신료)과 연계하는 선순환 규제 체계를 확립해야 한다.

사회통합과 국민의 삶에 기여하는 공영미디어
공영방송을 둘러싼 오랜 논쟁은 종종 정파적 유불리나 상업적 효율성의 잣대로 왜곡되곤 했다. 그러나 공영미디어의 본질은 민주주의 질서의 한 축으로서, 무한경쟁과 알고리즘이 지배하는 미디어 생태계에서 신뢰할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하고 사회적 연결과 통합을 이끌어 궁극적으로 국민의 삶을 풍요롭고 안전하게 지탱하는 핵심 공공 인프라다. 유럽방송연맹(EBU)이 천명한 보편성, 독립성, 탁월성, 다양성, 책임성, 혁신성의 가치를 지닌 공영미디어의 존재는 국민의 더 나은 삶과 건강한 민주사회를 위한 필수 조건이다.

지배구조를 개선하는 방송법 개정은 공영미디어 대전환의 출발점일 뿐이다. KBS는 대전환의 시기에 공영미디어의 역할과 위상, 시청자를 위한 공적 책무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나아가 방송사 내부의 신뢰 회복과 혁신을 바탕으로, 국회와 정부, 학계와 시민사회가 머리를 맞대어 PSM 비전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이루어내야 한다. 이를 통해 현행 방송법을 ‘공영미디어법’ 체제로 전환하고, 디지털 시대에 걸맞은 공적 책무, 보편적 접근성, 시민 참여 거버넌스, 안정적 공적 재원이 선순환하는 지속 가능한 제도를 확립해 나가야 한다. 시청자 주권을 바탕으로 ‘사회통합과 국민의 삶에 기여하는 공영미디어’로 거듭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