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통융합, 법과 구조로 해결 가능하다

[기고] 방통융합, 법과 구조로 해결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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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민 방통융합연구소 실장

본격적인 원고를 작성하기전, 여기 소개하고 싶은 기사를 인용한다.

2007년 7월 ‘경향신문’은 “통신과 방송 융합이 가속도를 내면서 관련 업체 간 전략적 제휴가 본격화되고 있다. 향후 방송과 통신 간의 법적 경계와 기술적 장벽이 없어져 다채로운 서비스가 이뤄질 것에 대비, 콘텐츠와 네트워크를 공유하거나 개발하는 등 정보기술(IT) 기업 간 합종연횡이 줄을 잇고 있는 것이다”며 “KT는 22일 자사 TV 포털인 ‘메가 TV’의 콘텐츠를 강화하기 위해 미국 메이저 영화사인 워너브라더스 및 국내 온라인 교육 업체 ‘메가스터디’와 콘텐츠 공급 계약을 체결했다고 밝혔다”

비슷한 시기, ‘한겨레’는 “방통융합을 하게 되면, 무엇보다 사회적 영향력이 큰 방송·통신 등 매체에 대한 규제와 산업 육성에 초점을 둔 진흥 기능이 나뉘어야 한다”며 “새로 설립될 방송통신위원회는 방송 및 통신 사업 인허가와 주파수 관리, 콘텐츠 심의 등 규제와 관련한 정책과 집행을 담당하고, 진흥 기능은 산자부와 문화관광부에 이관해 통합시켜야 한다는 얘기다. 더불어 방송통신위원회는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독립한 합의제 행정기관의 틀을 갖춰야 한다. 어떤 형태로든 국민 의식을 지배하는 미디어나 매체에 대한 규제 권한을 정부 부처의 손에 넘겨서는 안 된다”고 보도했다.

어떤 생각이 드는가. ‘경향신문’의 기사는 지금 들어도 일견 이해하기 쉽다. 방통융합의 미래를 통신 미디어 그룹이 선도하는 미래로 그리는 한편, 그 구체적인 청사진을 체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겨레’는 어떤가. 박근혜 정부 들어 방송정책의 진흥과 규제에 대한 광범위한 광의의 논쟁이 격화되는 지금, 꽤 시사하는 바가 크지 않은가. 우리는 여기서 방통융합의 기치로 탄생한 방통위의 역사를 보았다. 그리고 규제와 진흥을 구분하는 위험한 단언과 정책적 초입을 살필 수 있다. 당시 방통융합의 시대를 맞이해 방통위가 출현한다는 것은 그 만큼 위험한 단초였다는 뜻이다. 이 미약한 단초가 미래창조과학부의 신설과 방통위의 정책적 나눠먹기로 이어질줄은 꿈에도 몰랐으리라.

그렇다. 사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방통융합의 시대적 흐름은 자연스러운 관련 업계의 시너지 효과가 아니었다. 방통위의 출범부터 진흥과 규제를 나누자고 주장했던 학자들과 전문가들이 걱정했던 것을 상기하면 간단하다. 방통융합은 그 만큼 실제적인 정치환경의 역학구도를 그대로 닮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작은 차이로 인해 방송 및 통신 기술의 변화로 급격하게 요동쳤다. 지금의 방송정책 상황과 묘하게 겹치는 부분이다. 하지만 본 고에서 필자가 말하고 싶은 것은 방통융합의 실리적, 일반적 가치판단의 문제가 아니다. 그보다는 더 깊숙이 들어가는 부분을 말하려고 한다. 바로 방통융합의 주체와 그 주체가 보여주는 새로운 동력의 유무다.

여기서 우리는 방송위원회와 방통위의 흐름을 간파해야 한다. 방통융합은 그 당시만 해도 위험하고 불안한 모델이었다. 하지만 시대적 흐름과 세계적인 방송통신융합 기술의 대두로 우리는 적절하게 방향을 잡아 제대로 방향을 잡을 수 있었다. 바로 이 부분이다. 방통융합에 대한 오래된 오해는 바로 여기서 기인한 것이 아닐까. 방통융합은 애초 정치적 수사와 조직적 한계로 재단할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더욱 오래된 정책의 불균형성을 야기시키고 그에 따른 발달된 조직 문화를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방송위원회가 방송통신위원회로 재편되며 이러한 논란은 이미 시작된 것이나 다름 없었다는 것이다. 즉 방통융합에 대한 환상을 정치적 이해관계로 가져오면 날 것 그대로의 이론과 이슈가 보인다는 뜻이다.

여기에 우리가 방통융합이라는 자체에 가지고 있던 오해와 불신이 깃들게 된다. 대한민국은 정치적 함의로 방통융합을 따지고 재단하며 여기까지 온 것이다. 거대 기업을 주체로 하는 통신이 방송을 압박하며 그 영역을 민영화로 끌어내린 부분을 다시 한 번 찾아보자는 뜻이다. 그래서 현재 뒤틀려 버린 방통융합은 정치색을 제거한다는 전제로 법과 구조를 통한 해결방안이 가능해진다. 역설적이지만 ‘독’으로 ‘독’을 치료하자는 뜻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방통대군으로 여겨지는 방통융합의 상징을 아무 생각없이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이것이 과연 옳은가? 아니다. 우리는 그저 포기하고 살았을 뿐이다. 방통융합은 누군가의 전시행정이 되어서는 안되며, 그것 자체가 새로운 미래경쟁력의 시작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주장한다. 만약 방통융합의 기치가 새로운 구조적 문제로, 그리고 정치적인 함의의 등장으로 다시 한번 환상을 드리운다면, 우리는 방송과 통신의 분리를 정책 및 구조적으로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방통융합의 절대적 명제는 차치하더라도 그 가치를 최대한 살리기 위해서는 구조적인 분리도 충분히 해답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스마트폰 열풍이 세계를 강타하고 애플의 잡스가 전지구적 마법을 부리기 시작했을때, 우리의 통신사들은 시큰둥하며 그 기민한 반응을 저버렸었다. 그때 그들이 한 것이라고는 스마트폰이 대한민국에 상륙하는 것을 막으며 정부의 비호아래 ‘시간을 번’일 밖에 없다. 즉 스마트폰이 모바일 인터넷을 통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때 우리의 통신사들은 그 치명적인 효과를 간파하지 못하고 허송세월만 보내다가 뒤늦게 정부를 압박해 스마트폰의 유입을 막고, 그 번 시간을 통해 적극적인 지원으로 기술개발에 들어갔다는 뜻이다. 여기에 방통융합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스며들면 어떨까. 방통융합은 또 다시 이기적인 정책에 매몰되어 세계의 조류에서 탈락할 것이다. 법과 구조의 변화가 반드시 필요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