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 하나.
10월 9일 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 국정감사장. 전병헌 민주통합당 의원은 방송통신위원회가 제출한 ‘전국 디지털 전환 이후 디지털 방송 시청 가구는 98.6%’라는 자료에 의문을 제기하며 “이는 KBS1에만 국한된 것”이라고 언성을 높힌다. 동시에 전 의원은 “(전국 디지털 전환 이후 블랙아웃 사태를 맞이하게 되는 시청자들은) 유료방송을 신청할 수 밖에 없게 된다"며 "디지털 전환이 아닌 유료방송 전환"이라고 주장했다.
장면 둘.
10월 12일 서울 광화문 방송통신위원회. 이계철 위원장은 ‘디지털 전환 선진국’ 으로 불리는 영국 방송통신규제기관 오프콤의 CEO인 에드 리처드와 면담을 했다. 약 40분 동안 진행된 이번 면담에서 이 위원장은 전국 디지털 전환 사업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기 위한 ‘노하우’를 물었고 에드 리처드는 브로드 밴드 강국인 대한민국의 정책적 비법을 요청했다고 한다.
전국 디지털 전환이 이제 얼마남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탈법의 냄새를 풀풀 풍기는’ 12월 31일 이전 아날로그 방송 순차종료는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으며 동시에 멀쩡하게 잘 나오는 TV가 먹통이 되는 사례도 빈번하게 속출하고 있다. 이뿐이랴. 주먹구구식인 자막고지와 가상종료로 인해 직접수신률은 뚝뚝 떨어지고 있으며 아날로그 스위치 오프 전후로 유료 매체로 ‘갈아타는’ 시청자들의 지갑도 극적으로 얇아지고 있다.
그런데 이런 판국에 이계철 위원장은 9일 국감장에서 “(현재의) 디지털 전환은 디지털 전환이 아닌 유료 방송 전환”이라는 의원들의 비판에 “내년부터는 유선방송 중심으로 디지털 전환을 실시할 것"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재미있다 못해 흥미로운 발언이다. 의원들은 무료 보편의 방송 서비스가 전국 디지털 전환 이후에도 온전히 지켜지길 바란다는 뜻으로 그러한 비판을 했을텐데. 거기에 대고 이 위원장은 ‘무료 보편의 방송 서비스는 애초에 포기했고, 아예 전국민 유료 매체화를 더욱 촉진시키겠다”고 답변한 셈이다. 맙소사. 학생에게 교사가 “게임은 이제 그만 줄이고 공부를 해야지”라고 충고했더니 학생이 “저의 장래 희망은 프로게이머인데요?”라고 답변하는 격이다. 요즘 교권추락이 심각하다던데, 이제는 국감의 권위도 많이 추락했나보다. 하긴, 국감 증인 출석도 해외도피로 때우는 시대니 말 다했다.
그러나 이런 시니컬한 생각으로 애써 무시하려고 해도, 작금의 디지털 전환 정국이 ‘심각한 비상사태’에 빠져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학생이 숙제하기 싫다고 계속 미루다가는 교사에게 혼쭐나기 일쑤다. 그래서 이러한 불편한 상황을 초래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적어도 ‘남은 사람들’이 뭔가 하기는 해야 한다. 자, 뭘 해야 할까. 우선 문제점부터 파악해보자.
전국 디지털 전환 정국에 있어 가장 심각한 문제는 당연코 시청권 침해다. 이 부분은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재산권 침해로 인한 시청권 침해와 그 외의 광범위한 시청권 침해. 우선 재산권 침해 부분이다. 전국 디지털 전환에 따른 아날로그 불용장비 문제는 심각한 사안이다. 방송사야 공익을 위한 ‘다른 용도’로 타진한다고 해도(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게다가 큰 마음 먹고 좋은 일에 쓰려고 해도 일부 불편한 사례도 존재하기는 한다) 개인은 어떤가. 멀쩡히 잘 나오는 아날로그 장비를 버리고 디지털 전환 장비를 구입해야 하니. 황당할 것이다. 아마 이런 생각 많이 할 것이다. ‘전국 디지털 전환이 뭐 좋은 거라고’..하지만 시대의 조류니 그 정도는 이해해 달라고 부탁한다 쳐도 역시 멀쩡한 장비 버리고 새로운 디지털 장비를 구입하게된 시청자 입장은 분명히 헤아려야한다. 그런데? 방통위는 이런 부분에 있어 너무나 고압적이다. ‘국가에서 바꾸라면 바꿔야지 무슨 말들이 많아…’라고 생각하는것 같다. 당장 ‘미디어 발전을 위한 길입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단, 지원도 충분히 하겠습니다’라고 해야할 것을 ‘국가에서 하라면 해야지 뭔 말들이 많아…알았어, 알았어. 지원 해줄게. 까짓것’이란 마인드다. 황당하다.
게다가 광범위한 시청권 박탈 문제는 더 심각하다. 우선 자막고지와 가상종료 문제다. 아니, 제대로 홍보조차 하지 않았고 그에 따른 준비 작업도 충분하게 하지 않았던 방통위가 도대체 어디서 이런 용기가 났을까? 어쨌든 방통위는 각 지역별로 무리한 자막고지와 가상종료를 실시해 이에 불편을 느낀 시청자들이 알아서 유료 방송으로 유입되는 사태를 방치했다. 아니, 유도했다. 또 아날로그 순차종료는 어떤가? 탈법의 소지가 다분한 아날로그 조기 순차종료는 지금 이 순간에도 블랙아웃 사태를 유령처럼 일으키고 있다. 그리고? 분통을 터트리던 시청자들은 다시 유료 매체로 옮겨가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문제가 이뿐일까? 아니다. 시청권 침해 외에도 방통위는 디지털 전환 예산 삭감에 이은 채널재배치 예산 삭감, 홍보 부족 등의 논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물론 여기에는 다른 정부부처인 기획재정부의 만행이 결정적이었으나 그에 걸맞는 로드맵을 설정해야 하는 ‘방송 주무부처’인 방통위의 결정적인 실책도 크게 한 몫 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런데 이런 상황을 유심히 지켜보다보면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혹시 방통위는 방송의 무료 보편적 시대를 끝내고 전국민 유료 방송 시대를 열려는 것일까?’ 충분히 근거가 있지 않는가. 주먹구구식인 디지털 전환을 통해 직수율을 뚝뚝 떨어트리고 있으니. 당연히 유료 매체로 가입자가 흘러들어가게 될것이며 동시에 유료 매체 전성시대가 온다. 상당히 설득력 있는 ‘음모론’이 아닌가. 여기에 유료 매체만의 문제가 아닌, 지상파 방송까지 엮일 소지가 충분히 있는 ‘클리어쾀 방통위 지원 논란’과 ‘방통위의 지상파 다채널 서비스는 딱 기술 발전까지’를 복기해보자. 꽤 그럴싸하다. 하지만 설마 그렇게까지..비록 양휘부 케이블TV협회장이 정부에 막대한 케이블 디지털 전환을 요청했다고는 하지만 설마 ‘공공의 이익’을 대변해야 하는 정부부처 방통위가 전 국민 유료 매체화를 꾀할 이유가 있을까?
하지만 위에 소개한 장면 하나. 방통위 국감장에서 이 위원장은 그 음모론이 음모론이 아닌 진짜 ‘정책 로드맵’임을 당당히 밝혔다. 물론 이 위원장은 “올해까지 전국 디지털 전환을 완료하고 내년에는 케이블 중심의 디지털 전환을 하겠다”는 발언을 했다고 해도, 지금 돌아가고 있는 상황을 보라. 직수율 뚝뚝 떨어뜨리며 유료 매체에 가입자가 흘러들어가는 모습을.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12월 31일까지 지상파 디지털 전환을 완료하고 내년부터는 케이블 디지털 전환을 하겠다? 지금도 이럴진데 내년은 얼마나 더 끔찍하다는 소리인가.
물론 방통위 입장도 이해는 간다. 어찌되었건 시청권 박탈은 없어야겠는데, 유료 매체 플랫폼이 대부분인 우리나라에서 당연히 유료 매체 중심으로 디지털 전환이 이루어져야 하지 않겠는가. 여기에는 지상파 방송사의 잘못도 분명히 있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이 방통위에게 면죄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전국 디지털 전환을 맞이해 공공의 이익을 가장 잘 대변할 수 있는 지상파를 포기하고 유료 매체로 돌아서게 하려는 생각은 분명히 ‘틀렸다’는 것이다. 물론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닐 수도 있겠지만, 최소한 지금 돌아가는 상황은 그래 보인다. 보라. 주먹구구식인 가상종료 및 자막고지, 그리고 아날로그 순차 조기종료로 인한 직수율 하락. 지상파 다채널 서비스 미구현과 700MHz 대역 주파수 통신 할당. 여기에 채널재배치 등 각종 예산삭감. 이대로라면 지상파 방송의 직수율은 점점 하락할 것이고 결국은 고사할 위기가 닥쳐올 것이다.
그래서 주장한다. ‘남은 사람들이라도 뭐든 하자’고. 짧게는 가상종료 및 자막고지의 폐혜를 충분히 알리고 이를 위한 정책적 보완책을 마련하는 한편 탈법냄새까지 풀풀 풍기는 아날로그 조기 순차종료는 어떻게든 막아내던지, 아니면 최소한 ‘아날로그 나이트 라이트’와 비슷한 방법이라도 찾아보자는 것이다. 물론 예산 문제가 걸려 있어서 쉬운 문제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난시청 해소를 위한 방송사의 역량을 더욱 끌어올리고 그에 걸맞는 책임있는 자세를 보여준다면, 방통위도 뭔가 깨닫는 것이 있지 않을까? 지상파 다채널 서비스와 700MHz 대역 주파수를 통한 공공의 이익 현실화가 어느 정도 이루어질 토대가 마련되지 않을까? 물론 순진한 질문일 수도 있다. 이 모든 사안에 방통위가 걸려있기 때문이다. 정부 주무부처의 무서움은 바로 이런 부분에 있다.
끝으로 더 무서운 이야기 하나를 하고 마치겠다. 위에서 소개한 장면 둘. 이 위원장은 오프콤 CEO인 에드 리처드와의 면담에서 ‘늘어나는 무선데이터 폭증에 따른 주파수 관리 및 재분배 문제에 중요성을 같이하고 상호협력하기로’했단다. 모르겠다. 방통위가 어디 가서 주파수 이야기만 하면 왜 이렇게 무서운지. 그나마 유럽의 영국이라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