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에서 방송사 파업 해법을?

영화 [연가시]에서 방송사 파업 해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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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연가시의 흥행돌풍이 무섭다고 한다. 이 국산 토종 기생괴물의 위력은(우리나라에만 서식하는 것은 아니지만) 바다 건너 미국에서 날아온 거미인간의 힘을 무력화시키며 연이어 돈 많고 스펙좋은 박쥐 히어로의 아성에도 도전할 기세다. 좋다. 영화팬으로서, 광으로서 국내 영화의 선전은 아주 반갑다. 올 여름 극장가의 초입은 각종 괴수들의 대결로 후끈 달아오르는것 같아서 새롭고 좋다.

   
 

 

이 즈음에서 영화의 한 장면을 이야기해보려 한다. 영화 연가시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은 무엇일까? 아마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이야기를 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물을 벌컥벌컥 마시는 감염자들의 모습을, 어떤 사람은 물가로 뛰어드는 충격적인 타의적 집단 자살을, 어떤 사람은 아이돌에서 노인돌로, 이제는 배우로 성장한 김동완씨의 형사 연기를, 아니면 어떤 사람은 명배우로 거듭난 김명민씨의 너무 실감스러워 닭살이 돋는 연기를 꼽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조금 다르다. 태생이 반동이고 반역인지라 조금 다른 것일까. 나는 이 영화의 가장 인상깊은 장면을 오마이뉴스의 이슈 털어주는 남자가 깜짝 출연한 사실과 함께 마지막 트럭 씬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무슨 소리지? 하는 분들을 위해 기억을 상기하자면, 김명민씨가 가족을 살리기 위한 모든 시도가 좌절된 것을 확인한 다음 동생과 죽을 고비를 넘기고 트럭을 타고 어디론가 향한다. 그런데 그 순간 한 때 잘나갔던 김명민씨의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비누 만들기…쉽게 말해 짝퉁 약을 만들자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생각에 ‘꽂힌’ 그는 동생을 트럭에서 내리게 한 다음 그대로 원자재가 있는 공장으로 트럭을 몰아간다.

 

하지만 공장 앞은 이미 인산인해. 약을 달라는 사람들과 그 앞을 막아선 전경들로 인해 아수라장이다. 이런 상황에서 트럭을 몰아 들어가기는 어려운 일. 바로 그때, 김명민 씨는 트럭에서 내려 사람들에게 호소한다. ‘모두를 살리겠다’고 ‘길을 비켜달라’고. ‘다 같이 살 수 있는 길이 있다’고.

 

   
 

그 호소에 사람들은 움직인다. 절망적인 심정으로 탄탄한 전경의 방패앞에 울부짖기만 하던 그들은 이내 한 가지 목표를 발견하고 일사분란하게 행동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곤 단단해 보이기만 하던 전경의 대오를 기어이(?) 무너트리고 트럭이 지나갈 수 있는 길을 터준다. 그리고 김명민 씨는 잠시 쉼호흡을 한 다음. 트럭의 악셀을 강하게 밟는다. ‘공무집행’이라고 큼지막하게 새겨진 트럭은 그대로 정문을 뚫고 ‘모두가 살 수 있는 길’로 나아간다.

 

바로 여기서 현재 이어지고 있는 방송사 파업의 해결책을 찾아본다면 너무 억지일까? 맞다. 사실 억지이기는 하다. 영화속 그 장면은 사실 상투적이라면 상투적인 ‘주인공의 고난 극복’ 스토리이며 흔하다면 또 흔할 수 있는 ‘소소한 반전’이다. 그러나 이 통속적인 위기 극복 영웅 신화 속에서 나는 온전한 단 하나의 해결책을 보았다. 그것은 이제는 식상해져버린 국민의 뜻. 바로 그 의지다.

 

   
 

해당 영화의 그 장면에서 김명민 씨는 불청객이다. 그가 최선을 다해 가족의 약을 구한다고 할 지라도 영화 속 인물들 대부분은 그의 존재조차 모른다. 하지만 역으로 영화를 보는 우리는 안다. 김명민 씨야말로 영화 속 비극을 해결할 존재라는 것을. 그리고 모든 불합리함을 해결할 유일한 존재라는 것을. 거기에 더해지는 사람들, 민중들, 그리고 국가의 폭력.

 

김명민 씨를 공정언론을 위한 투쟁에 몸 던지는 각 방송사 노조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오그라드는가? 사실 이 글을 쓰는 나도 그렇다. 하지만 안면 바꿔서 다시 생각해보면 일견 일리는 있다. 그들은 정의를 위해 싸운다. 적어도 그렇게 주장하고 있다. 김명민 씨가 가족을 살리기 위한 투쟁에서 약의 생산이라는 ‘대승적인’ 목표로 잡았던 순간이, 각 방송사에서 가족을 위해 사회활동을 하던 노조원들이 공정방송을 위한 투쟁의 전선으로 나서던 그 순간과 묘하게 겹치는 것은 우연이 아니리라. 심지어 이 둘은 ‘스토리’도 같다. 노조원도 사람인지라 가족이 있고 생계 문제가 있다. 그래서 노조원들도 자신의 가족을 부양하기 위한 노력을 이어나가지만 곧이어 닥쳐올 거대한 위기는 가족의 안위만을 생각해서는 극복하기 어려움을 직감한다. 그래서 싸우러 나간다. 파업으로. 보라. 모두를 구하는 것이 가족을 구하는 것이라 믿는 김명민 씨와, 공정방송을 실현하는 것이 나와 가족에게 올바른 세상을 만들어 줄 것이라 믿는 노조원들은 묘하게 닮았다.

 

그리고 몇 가지 부수적인 ‘장치’ 이야기를 하자면. 전경 이야기를 안할 수 없다.

전경, 즉 전투경찰의 생명력은 ‘대오 유지’. 즉 절대 흐트러지지 않는 국가 권력의 상징이다. 제주도에서도 그렇고, 각 시위현장에사도 그렇다. 그들은 거의 무너지지 않는다. 이를 악물고 버틴다. 그들도 누군가의 아들이고 학생이며 인격체이지만, 전경이 되어 전투모를 쓰고 방패를 드는 순간 국가 권력을 상징하는 ‘힘’으로 단순해져 버린다. 그리고 그 ‘힘’들은 전 대통령이 살던 연희동에서도 무너지지 않았고 생존을 위한 투쟁을 부르짖는 공장 시위 현장에서도. 심지어 사람이 불타고 쓰러져가는 용산에서도 무너지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그들이 무너졌다. 비록 영화 속이지만 시위대에, 국민에게, 시민들에게. 지금까지의 경험과 더불어 대부분의 영화나 다큐멘터리 속에서 전경은 아무리 발악해도 넘어설 수 없는 존재였음에도 불구하고 영화 ‘연가시’에서는 무너진 것이다. 놀랍다.

 

   
 

또 하나. 김명민 씨의 부탁을 받고 국가의 힘을 무너트린 시민들의 힘.

여기서 나는 2012년 대선 정국을 앞두고 통합진보당 사태에서 기인한 ‘빨갱이 논리’를 살짝 들추어볼까 한다. 좌-우가 한창이 바로 이 순간. 어쩌면 김명민 씨의 호소를 듣고 자신들의 의지를 관철시킨 순수한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세력’으로서의 생명력을 가지는 것이 아닐까. 좌도, 우도 아닌 그저 순수한 시민의 힘. 이들은 매카시즘과 보수우빨의 논쟁에서 가장 자유로운 존재일 것이다. 그런 그들이 힘을 쓴다. 대의라곤 없는, 가끔은 한정된 약을 두고 서로 물어뜯고 짖밟지만 언제나 다시 일어나고야 마는 이들. 이들은 좌도, 우도 아닌 그저 하나의 다른 세력이자 ‘사람’이다. 그리고 그런 그들이 전경을 무너트렸다.

 

마지막으로 김명민 씨가 정문을 돌파하고 공장으로 난입할 때, 그 트럭에는 큼지막한 글씨로 ‘공무수행’이라고 써져 있었다. 실소가 터지지 않는가? 당장 국가가 해야 하는 일을 일개 시민인 ‘김명민 씨’가 하고있다. 시민의 도움을 받아, 거칠게 트럭을 운전하면서, ‘공무수행’이라 써진 글씨를 앞세우고.

 

방송사 지배구조 개선, 김재철 사장 퇴진, 언론장악 철폐. 이 같은 논의는 사실 좌-우 어디에서도 해결 방법을 찾을 수 없다. 하지만 요즘 일부 사람들은 이런 생각들을 하는것 같다. 방송사 파업이 ‘좌빨’의 생각대로 움직이는것 아니냐고. 그러나 이는 오해다. 당장 방송사 지배 구조 개선만 봐도 MBC 노동조합이나 KBS 노동조합 모두 이사진의 여야 동수를 요구하고 있다. 그런데도 ‘빨갱이’ 운운하는 이유는 아마 착시 때문이리라. 지금 우리나라는 ‘우’의 주도권 장악에 ‘좌’가 도전하는 형국이다. 항상 도전하는 쪽은 싸운다. 그런 그들이 자신들의 생각과 맞닿아있는 방송사 파업에 힘을 모으는 것일 뿐. 사실 이는 제 3세력인 ‘시민’으로 한정짓는 패러다임으로 이해해야 한다.

   
 

 

방송사 파업. 정치권에서는 하루가 다르게 말이 다르고 거기에 일희일비를 거듭하는 수많은 사람들로 정국은 어지럽다. 그런데 이 순간에 영화 연가시에 숨어있는 소소한 장치들로 그 해법을 찾아보면 어떨까? 이해하기 쉽기까지 하다. 연가시의 트럭 돌진 장면은 노조원들에게는 좌-우도 아닌 오로지 순수하고 이기적인 시민들의 동의를 구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움직여야 함을 통찰하고 있으며 그것은 감정적이든 기계적이든 전략이 필요함을 지적하고 있다. 사실 반드시 그래야 한다는 것이 정답이리라. 이는 견고한 ‘기득권 카르텔’이 변화를 보인다고 해서 그것에 의지하지 말라는 뜻이기도 하다. 아무리 ‘안타깝다’는 말이 흘러나왔다고 해도 그 ‘카르텔’에 의지하지 말고 마치 그런 말을 못들었다는 것처럼 끊임없는 시민 지원 요청 스탠스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카르텔을 무시하는 것은 안되지만.

 

그리고 시민들도 알아야 한다. 가끔은 이기적이기도 하고 볼썽 사납기도 하지만 좌-우에 치우지치 않은 자신들이야말로 모든 사회의 중심이라는 자각이 필요하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물어야한다. ‘무엇이 옳은가?’..가끔 명망있는 인사들은 이런 말을 한다. ‘최선이 아닌 차악을 택하라’고. 나는 이 말이 정말 쓸데없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현실적으로 볼 때 이해가 된다고 해도 이런 생각을 가진다면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타협하고 약해진 마음으로 자신의 이익만 각자 추구하는 분열만 일으킬 뿐이다. 시민들은 자각해야 한다. ‘최악을 내가 최선으로 바꾼다’고. 전경의 카르텔을 무너트린 영화속 그 장면처럼. 자신의 손으로. 일어서야 한다. 그리고 바꿔야한다. 만약 그것이 힘들다면 최소한 기득권의 달콤한 목소리에 속지는 말자. 당장 우리 가족 밥 한끼 먹기 힘들다지만..중요한 것은 생존 이전에 ‘사람답게 사는 법’이리라.

 

마지막으로 영화 연가시의 감독 및 관계자들게 사과드린다. 우리나라는 무엇이든 정치적으로 해석되면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는 희한한 고정관념이 있기에. 어찌 되었건 방송사 파업에 대한 글로 이 재미있는 오락 영화를 재조명 한것은 면목이 없다. 그러나 사실 나도 할 말은 있을것 같다. 소셜테이너들이 정치적 발언을 했다고 ‘너무 정치적이야~’라고 흉보는 사람들 마음속에는 ‘니까지것이 뭔데 나서서 지랄이야’ 혹은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 말을 함부러 하면 곤란하지’는 속마음이 숨겨져 있다고 믿는 나는 전적으로 이에 동의할 수 없다. 사람은 정치적 동물이고. 자살이나 살인, 강도 등을 부추기는 것이 아니라면 파급력을 고려하지 않은 자유로운 의견개진이 필요하다고 본다. 아, 약간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졌다. 다시 돌아와서, 연가시 감독님 및 관계자, 배우님들. 죄송합니다.

 

제 3의 세력, 시민사회세력. 이들이 방송사 파업을 도와야 한다. 그리고 노조는 카르텔의 반응 하나에 일희일비하는 ‘티’를 내지말고 아무리 가능성을 보았다 해도 마음속에 숨기자. 마음속에 숨긴다고 그 가능성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그저 그렇게. 시민들의 도움으로 굳건한 권력을 넘어 희망으로 가는 문을 열어야 한다. 그런 그들에게 ‘공무집행’이라는 타이틀은 너무나 잘 어울릴것이다. 절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