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HD TV에서 UHD 시대로

[칼럼] 디지털 HD TV에서 UHD 시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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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기술저널=호요성 방송미디어공학회장] 최근 국내 A 방송사 연구소에서 그동안 진행해 오던 방송 장비를 개발하는 국책 과제를 모두 중단한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내년 2월에 세계 최초로 시작될 UHD 지상파방송을 앞두고 카메라와 코덱 장치를 포함한 다양한 장치가 필요할 텐데, 이런 갑작스러운 결정이 약간 의아했다. 물론 신뢰성 있는 방송 장비를 단시간에 만드는 것은 너무 무리한 욕심일지 몰라도, 앞으로 펼쳐질 큰 그림을 생각하면서 이런 과제를 그대로 밀고 나가야 하지 않을까? 우리 속담에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고 하지 않았던가?

30여 년 전 내가 첫 직장으로 ETRI에 들어갔을 때, 그곳에서는 Z-80 마이크로프로세서를 이용한 전전자교환기(TDX) 개발 사업을 추진하고 있었다. 그 당시 우리나라에는 세계 여러 나라에서 사 들여온 다양한 종류의 전자교환 시스템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그들 사이의 호환성도 문제거니와 가격도 비싸서 전국적으로 보급하기엔 어려움이 많았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작했던 TDX 사업은 초반에는 크고 작은 난관도 많았지만, 결국 커다란 성공으로 이어져 시골 벽지에서도 생생한 음성 통화를 할 수 있게 했고, 수출은 물론 적지 않은 수입 대체 효과도 얻을 수 있었다. 이는 뚜렷한 문제의식을 갖고 해결책을 찾고자 했던 노력의 결실이었으며 이게 바로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끈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에서는 1956년 처음으로 흑백 TV 상업 방송을 시작했지만, 한동안 수상기 보급률이 너무 낮아서 방송사는 심한 적자에 허덕였다. 1966년부터 일본 회사들과 기술제휴로 시작된 흑백 TV 생산에 이어, 1969년에 흑백 브라운관이 국산화되면서 TV 수상기 보급이 크게 확산됐으며 수출 전략 상품으로 가능성을 엿보였다. 그런데 1970년 후반기부터 세계 여러 나라에서 컬러 TV 방송을 시작하자, 흑백 TV 시장이 점차 줄어들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정부 정책에 따라 수출용 컬러 TV를 생산하다가, 1980년부터 컬러 TV 방송이 허용됐다. 세계 여러 나라의 각종 규제에도 불구하고 컬러 TV의 생산과 수출은 매년 크게 증가했으며, 신기술 제품 개발을 통해 기술 경쟁력을 키워 나갔다. 그러나 가전제품에 대한 수출 환경은 날로 악화돼 갔으며, 이를 극복할 만한 뛰어난 기술력을 보유하지도 못했다. 그 당시 수출품은 거의 중저가 제품이었고, 그나마도 대부분 OEM(주문자 상표 부착) 방식으로 이뤄졌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국내 업체들과 정부는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1993년 대전에서 열린 EXPO 세계박람회를 계기로 정부의 지원하에 가전 4사에서 수행한 HD TV 시제품 개발과 전시는 하나의 획기적인 성공이라고 생각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한국의 전자산업은 일본의 기술을 바탕으로 출발해 일본에 대한 원초적인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었는데, HD TV 시스템 개발을 통해 우리 스스로가 일본을 따라잡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됐다. 그때의 산 경험이 결국 요즘 스마트폰으로 세계 시장을 제패하는 바탕이 되지 않았을까?

내가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마치고 처음 일한 곳은 미국 뉴욕주에 있는 필립스연구소였다. 허드슨 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배기에 다소곳이 서 있는 3층의 작은 건물에 200여 명의 기술자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일하고 있었다. 평소에는 자유시간제로 운영하던 다소 느슨한 연구 활동이 미국 디지털 TV 표준을 정하는 경쟁에 끼어들면서 그곳에서 작업하는 환경이 일순간에 급변했다. 미국 FCC에서 제시한 빡빡한 디지털 TV 테스트 일정을 맞추기 위해 우리 연구팀은 하루에 8시간씩 3교대로 편성해 밤낮없이 개발 작업에 매달렸다. 미국 디지털 TV 표준을 정하는 과정은 3개의 기술 컨소시엄에서 만든 하드웨어 시스템을 이용한 현장 기술 검사를 마친 뒤, 1993년 결국 Grand Alliance를 만들어 대타협이 진행되고, 그 결과로 미국의 ATV 표준이 만들어졌다.

이제 우리는 디지털 HD TV를 거쳐 바야흐로 UHD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그동안 우리에게 익숙하던 기존의 틀을 깨고 새로운 세상으로 한 단계 도약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어려움과 고통이 뒤따르겠지만, 우리는 역사적 사명감과 투철한 직업 정신으로 이를 이기고 극복해야 한다. 예전처럼 단순히 남을 뒤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남보다 앞서 나가야 하기 때문에, 이젠 우리 스스로 새로운 길을 개척해 가면서 더 열심히 노력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