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시간, 세계의 시간

[조준상 칼럼] 한국의 시간, 세계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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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시간, 세계의 시간


조준상 공공미디어 연구소 부소장

지난 20여년 간 세계를 풍미해온 투자은행 중심의 금융자본주의가 붕괴했다. 미국의 대형 투자은행 3곳이 파산했고, 2곳은 은행지주회사로 바뀌었다. 전 세계에서 크고 작은 20여개 은행이 사라졌다. 이와 함께 유럽을 중심으로 신브레턴우즈 체제를 구축하자는 제안이 쏟아지고 있다. ‘성찰’의 시도다. 미국도 마찬가지다. 10월1일 의회를 통과한 긴급경제안정화법안(EESA)는 7천억달러 긴급 구제금융 제공에 한정돼 있지 않다. 상업은행의 자기자본비율 규제에 국한돼 있는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의 규제대상과 범위를 확대하는 내용을 포함해 현행 규제시스템의 효과성에 대한 특별보고서를 2009년 1월과 6월 각각 제출하도록 돼 있다. 과거에 대한 뼈저린 성찰이다.

비록 한참 늦긴 했으나, 바야흐로 세계는 금융자본주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는 성찰의 시간에 들어섰다.

그러면 한국은? 불행하게도 그렇지 않아 보인다. ‘즉흥’의 시간에 있다. 전 세계금융위기는 그나마 합리적으로 유지돼온 국내 금융-산업자본 분리 각종 방화벽을 해체시키는 구실로 악용되고 있다. 국제통화기금 구제금융 사태 이후에도 끈질기게 살아남은 경제관료들은 권위적 시장근본주의를 더욱 철저히 밀어붙이고 있다. 가계 소득에서 은행에 갚아야 할 원리금이 일정 비율을 넘지 못하도록 하는 총부채상환비율(DTI)나 주택담보인정비율(LTV)을 완화하지 않는 대신, 수도권의 주택투기지역과 토지투기지역을 몽땅 해제하는 방식으로 은행의 주택대출을 확대하는 방안을 추진하는 것도 그 하나다. 이를 통해 미분양 사태를 해소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그나마 자금 여력이 있는 가계의 자금에다 은행의 대출을 추가로 투입해 현재의 부동산 거품을 고스란히 유지하겠다는 것을 뜻한다. 이보다는 주택가격의 거품이 꺼지는 정도를 예측하고, 분양원가 공개를 전제로 정부가 미분양 주택을 직접 사들이거나, 신규 주택 매입자에게 상당한 세제 혜택을 주는 편이 훨씬 덜 위험하고 비용이 적게 드는 대책에 가깝다. 물론, 정부 계획에는 2조원 정도를 미분양 주택 매입에 사용하겠다는 방안이 포함돼 있긴 하다. 하지만 무게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투기지역 해체에 있다.

국내 언론 분야는 어떨까? 역시 혼돈 그 자체다. 방송산업의 경쟁력을 높이고 방송시장의 규모를 키운다는 말은 구실일 뿐, 동원하는 정책수단과 따로 놀고 있다. 미디어 소유 대기업 기준 완화나 종합편성채널 도입이 여기에 해당한다. 미디어 소유 대기업 기준을 왜 완화하는지는 지금까지 불투명하다. 각종 토론회 등에서 나온 내용을 보면 종합하면 그 속내는  ‘보도 기능 줄테니 투자하라’고 대기업에 손짓하는 것이다. 종합편성채널 도입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대우조선 인수전에서 GS그룹과 포스코가 이탈하고 한화그룹만 남아있는 게 현실이다. 한화그룹의 떨어지는 주가는 득과 실 중 어느 것이 많은지를 짐작하게 한다.

개인적으로 미디어 소유 대기업 기준 완화나 종합편성채널 도입의 귀결도 이와 비슷할 것이라고 판단한다. 지상파방송과 종합편성채널이 사실상 아무런 차이가 없음을 인정하고, 수평적 규제체계 도입의 원리에 따라 콘텐츠와 광고 규제 등에서 동일한 잣대를 적용할 경우, 이런 귀결은 불가피하다. 하지만현 정권은 이런 결과를 원하지 않을 것이다. 종합편성채널에 대한 불합리한 우대 정책을 펼 것으로 예상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초장부터 종합편성채널에 저주를 퍼붓자는 게 아니다. 종합편성채널 도입의 제도 환경을 어떻게 짤 것이냐 하는 것을 묻는 것이다. 그 핵심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지상파방송과 종합편성채널 중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지에 시청자의 실질적인 선택권이 보장될 때까지, 지상파방송과 종합편성채널에는 동일한 규제가 적용돼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막강한 여론 행사를 하는 종합편성채널에 대한 외국인 간접소유에 대한 차단막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행 방송법은 외국인의 지분이나 주식이 50% 이상이거나 외국인이 최대주주인 국내법인에 대해서만 외국인으로 간주하는 외국인 의제조항을 두고 있을 뿐이다. 여기에 해당하는 국내법인은 1인 소유지분 상한선 30% 한도 안에서 얼마든지 종합편성채널과 보도전문채널을 간접소유 할 수 있다. 대기업이 연합해 구성하는 컨소시엄에서 차지하는 글로벌 미디어 그룹의 지분이나 주식이 50%만 안 넘으면 상관없다.

현 정권에 진심으로 권고한다. 감정을 접고 성찰의 시간을 가져라. 경제위기 상황에서 미디어분야에서 차근차근 풀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정리할 시간을 가져라. 미국이 현행 금융규제 시스템에 대한 성찰 보고서를 내년 1월과 6월 제출하도록 하고 있는 것처럼, 미디어 환경에 대해서도 이런 접근법을 한번 취해보라. ‘노변방담’보다 이게 더 위기상황에 걸맞는 ‘성찰적’ 미디어 정책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