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통으로 소통하다.. 영화 ‘만추(晩秋)’

불통으로 소통하다.. 영화 ‘만추(晩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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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에는 영화 ‘만추’의 줄거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직 영화를 관람하지 않으신 분들에게는 이 글이 영화감상의 재미를 반감시킬 수 있으니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여기 한 여자(애나)가 있다. 그녀는 ‘사랑’이 두렵다. 그녀 곁에 있던 남자들은 하나같이 무책임했다. 한 남자는 그녀를 사랑한다고 했으나 갑자기 떠나버렸고, 또 한 남자는 그녀를 믿지 못하고 폭력으로 속박하려 했다. 그리고 오랜만에 찾아간 그녀의 가족들조차 그녀를 ‘어머니 유산 분할에 동의’할 도구적 존재로만 대접하고 있었다.
여기 한 남자(훈)가 있다. 그는 ‘사랑’에 능숙하다. 그는 사랑에 굶주린 여자들에게 애인노릇을 해주며 돈벌이를 한다. 그러기에 그의 사랑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어서 누군가 그 이상의 관계를 원하면 그는 떠나버리고 만다. 그리고 그는 지금 그 ‘난처한 상황’ 때문에 원하지 않는 여정을 떠나있는 중이다.

이 두 남녀는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서로의 처지를 전혀 알지 못한다. 애나는 자기가 왜 그렇게 슬픈지, 훈은 자기가 이곳에 와 있는지를 서로에게 털어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영화의 재미있는 부분은 두 사람이 ‘비밀의 언어’로 대화하면서 서로의 마음을 조금씩 위로해간다는 사실이다.

애나는 자신의 아픈 비밀을 훈이 알아듣지 못하는 중국어로 털어놓는다. 애나는 위로 따위는 기대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훈은 비록 자신이 알 수 없는 언어이지만, 단 두마디 ‘하오(好, 좋군요)’, ‘화이(, 나쁘네요)’만으로 여자와의 소통을 시도한다. 두 사람의 대화가 제대로 이어졌을리 없다. 하지만 훈은 무모한 시도를 계속한다. 애나 어머니의 장례식 피로연장에서 훈은 애나의 옛 남자와 동석한다. 두 남자는 직감적으로 서로의 존재를 불편해하고 급기야 몸싸움을 벌인다. 하지만 훈이 싸움을 벌인 것은 그가 화가 났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를 대신해 옛 남자에게 사과를 받아내기 위해서였다. 훈은 애나가 슬픈 ‘이유’를 알지는 못했지만, 단 하나, 애나가 옛 남자로부터 사과를 받아야할 상황이라는 것만은 확연하게 느꼈기 때문이다.
뜬금없이 포크를 들먹이며 애나가 옛 남자에게 화를 낼 수 있도록 만드는 훈. 비록 옛 남자로부터 ‘저 사람 포크를 써서 미안해’라는 사과 아닌 사과를 받아내는 것뿐이었지만, 애나가 참아왔던 설움을 폭발시킬 수 있도록 만든 훈의 그 심리를 무어라 표현해야 할지는 영화를 보고 한참이 지난 지금도 아직 모르겠다. 그리고 또 하나, 그로 인해 애나가 과연 위안을 얻었을지도 궁금하다.

화려한 색으로 물든 가을은 지나고, 웃고 떠들며 붐비던 관광객들이 모두 떠난 텅빈 놀이공원처럼, 잠시 화려한 낙엽이 남아있다해도 곧 차가운 겨울이 닥쳐올 것을 알기에 더욱 아쉬운 가을의 끝, ‘만추(晩秋)’. 두 사람의 불통(不通)스러운 소통(疏通)은 기발했고, 또 기발한 만큼이나 애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