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방송기술연구소 권태훈

[기술인이 사는 법] KBS 방송기술연구소 권태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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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과 음악열정을 스래쉬 메탈에 녹이다 


부천시 중동의 한 오래된 상가건물 지하.

 

 

문을 열고 들어서자 보컬 녀석이 반가이 인사를 건넨다. 길에서 만나면 눈 한번 마주치기도 부담스러운 인상이지만, 의외로 국내 굴지의 게임 회사에서 프로그래머로 일하고 있다.직업 탓인지 보기완 달리 상당히 꼼꼼해서 밴드의 살림을 맡고 있다. 항상 먼저 와서 멤버들을 기다리는 것은 녀석의 새빨간 두카티 바이크가 ‘razor bullet ’보다 빠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연습실에서 들려오던 드럼 소리가 멈추고 밴드의 맏형인 드러머가 나온다. 2001년에 모 음악 동호회에서 만나 나와 같이 이 밴드를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전설의 ‘좋았던 쌍팔년도 ’에 음악을 하다가 약 10년 동안 제품개발과 산업디자인을 하다가 다시 시작하는 음악인만큼 항상 노력하고 열정적이다.

약속이 가까워진 시간에 멋진 V형 기타를 등에 멘 훤칠한 키의 사내가 들어온다.우리 밴드의 리드기타다. 의도적으로 뽑은 것은 아니지만 전원이 엔지니어인 우리 밴드의 특성상 이 친구도 모 바이오 회사의 프로그램 팀장으로 일하고 있다.

나는 요즘 3 ·40대들 사이에서 유행이라는 ‘직장인 밴드 ’를 꽤 오래전부터 해오고 있다. 하지만 우리 밴드가 다른 3 ·40대 직장인 밴드와 다른 점은 ‘메탈 밴드 ’라는 점이다. 그것도 힘들기가 육체노동 수준이라 하여 우스개로 ‘노동요 ’라고까지 불리는 ‘스래쉬 메탈 ’을 전문적으로 하는 밴드라는 것이다.

쉽게 메탈 중에서 가장 시끄럽게 달리는 음악이라고 생각하면 맞을 것 같다.우리는 홍대 앞 ‘Sky High ’클럽에서 열리는 ‘Death Party ’에서 공연을 하기로 되어 있다. 공연 당일 몸 풀기와 장비 운반을 위해서 전용 합주실에 모인 것이다.
생각해보면 밴드를 시작한지도 벌써 15년이 훌쩍 넘었다. 대학 다니면서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시작한 취미밴드, 대학원 다닐 때쯤 시작해서 이랬건 저랬건 정규 앨범까지 냈던 모 밴드. 그리고 2001년에 결성해서 지금까지 해오고 있는 ‘페디그리 ’밴드까지 참 오래도 했다.첫 공연 때 대형실수 하고 며칠 동안 창피했던 기억, 음악을 통해 새로운 사람들을 알아가는 기쁨, 클럽공연에서 와이프에게 프러포즈를 해주려고 스래쉬 메탈밖에 모르는 멤버들에게 김동률과 퓨전재즈를 연습시켰던 기억들이 새삼스럽게 떠오른다.

오늘 연습에서는 포지션 별로 평소에는 하지 않던 실수들을 많이 한다. 실수 지적하기 대장인 보컬 녀석이 틀리는가 하면,심지어는 리듬의 달인 칼박 드러머형님도 드럼을 치다가 박자를 놓치기까지 한다. 그래서그런지 오늘 공연에 대한 부담감이 많이 줄어든다. 왜냐하면 우리 페디그리는 공연전 합주를 망치면 본 공연을 잘하는 징크스가 있기 때문이다.

오늘은 예감이 아주 좋다.

Sky High클럽에 도착하니 클럽의 오너인 기타리스트 이현석 씨가 예의 그 무심한 얼굴로 반가이 맞이한다.

무언가 검은 오로라가 뿜어져 나오는 듯 시커먼 인상의 팀들이 무대에서 굉음을 내며 공연 전 리허설을 하고 있다. 사혼, 마하트마, 메써드, 닥솔로지, 엘 파트론. 다들 앨범들도 한두 장씩 내고 5년에서 10년씩 열정적으로 활동해온 쟁쟁한 팀들이다. 같이 공연하는 이 사람 좋은 헤비메탈 사나이들은 만날 때마다 서로를 격려하고 용기를 북돋아 준다.첫 인상은 험하지만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이렇게 순수하고 좋은 사람들이 어디 있을까 싶다.

먼저 도착한 밴드들과 인사를 나누다 보니 우리 리허설 순서가 되었다. 라인 체크와 간략한 레벨/사운드 체크를 마치고 한두 곡 정도를 연주해 본다. 공연 시작 시간이 다가오니 클럽에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고 나도 준비를 한다. 안경을 벗고,검은 셔츠를 입고, 두건을 쓴다. 장발에 수염, 문신까지 있는 다른 밴드들에 비하면 전혀 튀지 않지만 큰 걱정은 안된다. 지금 이 순간에는 나는 나의, 우리는 우리의, 음악을 하면 그 뿐인 것이다. 드디어 페디그리 차례다. 무대에 올라 앰프에 잭을 꽂고 EQ와 게인을 맞추고 긴 호흡을 고른다.몇 십 번이나 해 온 공연이지만 이 때 긴장감과 설렘은 항상 오묘한 느낌으로 심장을 새롭게 만든다.

보컬의 입담이 관객들을 선동하며 첫 곡이 터져 나온다!첫 곡 첫 마디를 연주할 때의 이 짜릿함! 세상 무엇이 이 느낌을 줄 수 있을까? 각기 다른 삶을 살고 있는 네 사내가 한 마음으로 한 곡 한 곡을 온 힘을 다해 연주하고, 관객들은 그 사내들에게 뜨겁게 호응한다!이것이 바로 내가 아직까지 음악을 하게 만드는 이유일 것이다.

페디그리 밴드 사이트 :http://cafe.daum.net/metalped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