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우고 채우기 위해 달린다_MBC영상기술부 부장 강태선

[기술인이 사는 법] 비우고 채우기 위해 달린다_MBC영상기술부 부장 강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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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는 글을 쓸 기회가 오리라고 믿었지만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다. 그래 눈을 감고 내 인생의 클라이막스로 돌아가 보자! 언제나 즐거운 그 때 그 기억으로!!

미국 연수중이었다. LA 출장이 끝나기가 무섭게 뉴욕시티 마라톤이 계획되어 있었다. 바쁜 일정이라 달리기 연습이 쉽지 않았으니 은근 부담이 되는 것이 사실이다. 스테이튼 아일랜드의 베라자노 브리지에서 출발하여 뉴욕의 5개 Borough를 모두 돌아 센트럴 파크까지 오는 풀코스이다. 마라톤을 통하여 천식과 무릎 통증을 치료했다고 믿고 있는 나는 마라톤이 즐겁다는 것을 그저 피상적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까지 즐거울 수 있는지는 몰랐다.

토요일 아침에 프렌드 쉽 펀런을 위해 유엔본부에 각국 나라 참가자들이 모였다. 그들 중에는 각기 자기 나라 고유의 의상을 입은 사람도 많다. 모두 들떠 보였다. 그들은 자유롭게 모이고 흩어지며 사진을 찍고 각국 나라 사람들과 반가운 인사를 나누기도 하면서 그렇게 시간을 보낸다. 특히 전통의상으로 튀는 의상을 입은 아가씨들은 단연 인기 만점이다. 일본 의상의 두 아가씨들은 남자들 틈에서 시간가는줄 모르고 사진을 찍어 주고 있었다. 나도 그 틈에 끼어 사진 찍고 어설픈 영어로 인사를 나누었다. 그저 구경만 하는 것도 너무 재미있는 경험이다. 뉴욕한인 마라톤 협회에서 온 교포 아저씨, 아줌마들과 만나는 일도 흥겹다. 이내 마라톤찬사가 튀어 나온다. 마라톤을 남편과 같이 하도록 밀어주는 시어머니가 고맙다며 연신 시어머니 자랑도 곁들인다. 많은 사람들 사이에 끼어 유엔 본부를 출발하여 복잡하던 42번가를 따라 걷는 듯 뛰기 시작했다. 뉴욕의 대로를 뛰는 것은 정말로 즐거운 일이다. 곳곳에 밴드들이 흥겨운 음악을 들려준다. 사진을 찍으며 찍어주며 거리를 구경하며 또는 낮선 외국 사람들과 간단한 인사를 나누며 뛰다 보니 어느덧 센트럴 파크다.
다음날 일찍 풀코스 마라톤 레이스의 출발점으로 향했다. 7시부터 교통통제가 된다고 한다. 3만 명이 넘는 인파가 질서 있게 스테이튼 아일랜드의 파크로 모인다. 조금 지루한 느낌이 들지만 야릇한 흥분이 흐르고 있다.
드디어 출발이다. 베라자노 브리지를 건너면서 감상하는 뉴욕의 경치는 압권이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응원행렬이 우리를 맞는다. 끝이 보이질 않는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흑인백인 황인을 막론하고 모두(정말 모두이다. 오늘은 오로지 마라톤을 위한 날이다) 나와서 응원을 한다. 거리의 밴드는 연신 나름대로 음악을 연주하고 춤을 추면서 손을 흔들고 교회의 교인들도 모두 나왔다. 그들에겐 이것이 예배라고 했다. 어린이들도 빠지지 않는다. 5Km 정도를 가니까 이제는 간식이 나온다. 그런데 조직위에서 준비한 간식 외에도 거리의 응원하는 사람들과 어린이들도 나름대로 간식을 준비하고 나눠준다. 이것은 나로서는 놀라운 일이었다. 자원봉사는 그저 나의 시간만을 투자하는 것으로 알았는데 이 사람들은 자기의 주머니까지 털어서 봉사를 하는 것이다.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닌데 그들은 그저 그것
이 즐거울 뿐이다. 이런 응원을 받으며 달리니 감히 걸을 수가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나는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이 달렸다. 감동과 감사를 동시에 안고 달린 풀코스 도전을 이 곳 뉴욕에서 마치게 됨을 감사한다.
내 인생의 클라이막스는 그렇게 달리면서 이루어졌다.
또다른 마라톤을 기억해 보자. 약간의 한기가 느껴지는 11월초의 잠실 경기장! 일년에 두 번은 풀코스를 뛰자고 맘먹은 대회이다. 매번 참가하는 대회지만 늘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오는 풀코스 마라톤은 그래서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이 느껴진다. 지하철을 내려 경기장으로 가는 길은 늘 시골 장터같은 정겨움이 느껴진다. 각양 독특한 의상을 입은 참가자들의 모습을 구경하며 스트레칭을 시작한다. 서로의 어깨를 주물러 주고 하면서 벌써 레이스 파트너가 되었다. 폭죽이 터지면서 카운트 다운을 외치고 드디어 출발이다. 짜릿한 흥분이 흐른다. 6개월을 기다린 레이스다. 여러 해 마라톤을 하면서 힘
든 마라톤을 하는 멋진 대답을 찾았다. 비우고 채우기 위해서 나는 달린다고!! 처음 8Km 구간은 내 몸과 영혼의 잡다한 것이 다 드러난다. 어젯밤 또 마라톤에 나간다고 구박하던 아내의 잔소리도 생각나고 아들놈 학원비도 걱정되고 처리 못한 회사일도 갑자기 튀어 나온다. 8Km를 지나 달리기에 몰두하게 되면서 이런여러 가지 생각들이 비워진다. 무념 무상의 상태에서 나만의 세계로 깊이 빠져든다. 가장 평화롭고 안정된 시간이다. 내 앞으로 난 길을 따라서 나만의 레이스를 펼치는 행복한 시간이다. 간혹 응원해주는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기도 하면서 레이스를 즐긴다. 30Km 를 넘어서면 이제 내 몸의 체력이 바닥을 드러낸다. 다리에 힘이 풀리고 힘차게 힘들던 팔도 쳐지기 시작한다. 이제부터가 진짜 풀코스 마라톤의 매력(?)이 드러난다. 이제부터는 내 체력이 아닌 정신으로 달려야 한다. 그러려면 정신에 힘을 주어야 한다. 지금까지 비웠던 내 마음을 채울 때다. 온갖 아름다운 것들로 내 마음을 채운다. 어제 밤 구박하던 아내를 떠올린다. 고생하는 아내에게 완주하고 이 기쁜 소식을 전해야
지. 앞으로 더욱 잘 해주겠다고 말해야지. 이유없이 밉기만 했던 회사의 동료도 생각난다. 화해하고 따뜻한 말이라도 해줘야지. 아름다운 기억들로 가슴을 채워간다. 가족과의 즐거웠던 시간들을 떠올리며 그리고 완주해서 누릴 즐거운 일들을 떠올린다. 이 풀코스의 감동을 드라마틱한 글도 쓸 때를 생각하면서!!
온갖 이런 아름다운 것 즐거운 것으로 내 비워졌던 마음을 채우다 보면 어느새 피니쉬 라인이 보인다. 트랙을 돌면서 박수 갈채의 응원소리는 없지만 관중석을 보면서 손도 흔들어보고 대형 전광판의 내 모습도 찾아보면서 트랙을 한 바퀴 돌고 감격의 완주를 마친다. 이제 나는 새로운 나로 다시 태어난 기분이다. 내 마음속의 온갖 더러운 것을 모두 버리고 깨끗하고 아름다운 것들로 가득 채우고 그 자리로 돌아왔다.
마라톤은 "인생의 액센트”이다. 어느덧 나는 다음 대회를 떠올리며 즐거운 상상에 빠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