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방송의 현주소: 비판적 방송저널리즘의 위기

[기고] 한국 방송의 현주소: 비판적 방송저널리즘의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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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일 극동대학교 언론홍보학과 교수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는 촛불집회가 한창이던 2008년 6월 이명박 대통령은 특별기자회견에서 “지난 6월10일 광화문 일대가 촛불로 밝혀졌던 그 밤에, 저는 청와대 뒷산에 올라가 끝없이 이어진 촛불을 바라보았다”며 “캄캄한 산중턱에 홀로 앉아 시가지를 가득 메운 촛불 행렬을 보면서 국민들을 편안하게 모시지 못한 제 자신을 자책했다”는 소회를 피력했다. 이제 막 출범한 이명박 정부에 촛불은 깊은 트라우마가 되었다.

트라우마의 유발요인은 자명했다. 출범 초기부터 국민들과의 소통과정 없이 일방적으로 밀어붙인 정책추진이 문제였던 것이다. 그런데 정부는 그 원인을 전혀 엉뚱한 곳에서 찾았다. 광우병의 위험성을 다룬 MBC <PD수첩>의 허위보도가 국민들을 자극해서 거리로 나오게 했다는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정부는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공권력을 이용해서 집요한 공세를 취했다. 언론중재위원회에 중재신청을 하고 방송통신위원회에 제재를 요구하는가 하면 제작진을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31개월 만에 내려진 재판결과는 무죄였다. 이는 당연한 귀결이다. <PD수첩>의 보도내용은 유발원인이 아니라 이미 깊어진 상처의 증후였을 뿐이다. 당시 끓어오르기 시작한 민심을 그대로 보여준 것이다. 정부의 진단은 심각한 오진이었다.

하지만 명백한 오진에 뒤이은 정부의 자가치료는 특정 프로그램에 대한 분풀이에 그친 것이 아니었다. 이번 기회에 방송의 비판적 보도기능을 마비시키기로 작정한 듯하다. 먼저 시작한 일이 공영방송 경영진 교체였다. KBS 정연주 사장에 대해서는 해임처분을 하고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경영상 배임혐의로 긴급체포하였다. 그러나 대통령의 KBS 사장 해임은 재량권 일탈이고 정 사장의 배임혐의도 무죄라는 법원 판결이 내려졌다. MBC의 경우도 경영상 별 문제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프로그램 편성도 경영에 포함된다’는 논리를 동원해서 <PD수첩> 등의 방송을 문제삼아 엄기영 사장을 억지로 끌어내렸다.

이렇게 부당한 방법과 논리를 동원하여 현 정부가 임명한 새로운 경영진은 기대대로 비판적인 방송저널리즘의 싹을 잘라내기 시작했다. 조직 개편과 인사조치를 통해 프로그램에 대한 내부통제 기능을 강화했다. 이런 조치들은 특히 비판적인 시사보도 프로그램을 제작하던 시사교양부서에 집중되었다. 조직이 나뉘거나 해체되는가 하면 주요 PD들을 비제작부서로 보내는 등 보복성 인사가 단행되었다. 조직개편이나 인사이동은 경영진의 당연한 권한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권한을 행사할 때에도 구성원들이 수긍할 수 있도록 합리성과 타당성을 가져야 하는데 현실을 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음을 알 수 있다.

새로이 구축된 내부통제 시스템이 작동하면서 정치적으로 민감한 아이템은 아예 제작을 할 수 없게 되었고, 심지어 이미 제작된 프로그램도 방송이 금지되거나 내용을 수정해서 내보내는 지경에 이르렀다. 천안함 사건, 4대강 사업 관련 프로그램이 그렇게 규제를 당했고 얼마 전에는 정치인 부인의 일상을 다룬 시사다큐 프로그램이 정치적으로 논란의 여지가 있다는 모호한 이유로 불방되기도 했다. 심지어 프로그램 출연자의 정치적 성향까지 문제가 되고 있는 실정이다. 뚜렷한 이유도 없이 프로그램 진행자가 교체되는가 하면 탤런트 김여진 씨의 라디오 고정출연 문제로 인해 담당국장이 문책을 당하고 고정출연 제한과 관련한 방송사 심의규정이 개정되기도 했다.

현 정부 출범 이후 지난 3년간 방송현장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태들을 보면 우리나라가 권위주의 정권 시절로 되돌아간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이다. 그러나 그 과정을 면밀히 보면 과거와 달리 정부나 정치권 등 외부의 압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방송사 내부의 통제기제에 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정부가 임명권을 가진 경영진이 조직개편을 통해 내부통제를 위한 경로를 단단히 구축하고, 내부심의 기능을 통해 프로그램 내용을 규제하고 이에 불응할 경우 인사조치를 취하는 등의 방법을 이용해서 제작진 스스로가 아이템 선정에서 편집까지 일상적 자기검열을 수행하도록 순치한 것이다.

그렇다고 현 정부가 무슨 뚜렷한 방송철학이 있거나 방송을 길들이기 위한 정교한 전략을 펼치고 있는 것으로 보기는 어려울 듯하다. 미디어렙 제도나 수신료 문제 등 중대한 방송정책에 대해서 여태껏 갈팡질팡하는 것이나 종편채널을 무턱대고 4개나 허가하는 등의 행태를 보면 짐작할 만하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제작진들도 경영진의 개입을 그리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현 정부의 촛불 트라우마를 치유해 보이겠다는 일부 경영진의 과잉충성이 그동안 쌓아온 방송편성의 자유와 독립을 침해하는 어처구니없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이렇게 한 번 구축된 내부통제 기제는 지속적으로 비판적 방송저널리즘을 저해하는 요소로 작용할 공산이 크다. 더욱이 2012년 총선과 대선 국면에 접어들면서 방송에 대한 외부의 압력이나 공세까지 거세질 것으로 예상된다. 방송편성의 자유와 독립은 법에 명시되어 있다고 해서 저절로 지켜지는 것이 아니다. 방송제작에 종사하는 모든 이들이 함께 지켜나가야 할 고귀한 민주적 가치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