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익(公益)에서 사익(私益)으로, 사익(私益)에서 사악(邪惡)으로!

공익(公益)에서 사익(私益)으로, 사익(私益)에서 사악(邪惡)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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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황희석 변호사
 

사법연수원 수료를 앞두고 진로를 결정할 무렵 한 때 검사가 될 생각을 한 적이 있다. 1주일에 한, 두 번 재판하는 것을 빼고는 절간의 스님마냥 하루 종일 기록만 쳐다보고 있을 판사보다는 그래도 활동적으로 일할 수 있는 검사가 필자 성격에 어울린다는 조언을 들었던 데다가 나름 자식 부끄럽지 않게 그래도 정의감을 살려 일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요즘 들어 그런 한 때의 생각이 얼마나 순진하고 어리석은 것이었는지, 검사가 되지 않은 것이 얼마나 잘한 선택이었는지 새삼 깨닫고 있다.

검찰이 PD수첩 광우병 편의 제작진을 허위사실에 의한 명예훼손과 업무방해죄로 기소한 것으로도 모자라 제작진에 포함된 작가의 이메일을 공개하고 이를 증거로 제출하여 논란이 일고 있다. 기실 문명국가 중에서 명예훼손을 범죄로 처벌하는 나라가 없는데 정부 정책의 문제점과 위험을 지적한 프로그램을 방영한 것을 공직자의 명예를 훼손하였다며 범죄로 처벌하겠다는 것도 후진국 법제의 전형이지만, 작가가 지인에게 보낸 사적인 이메일을 공개한 검찰은 후진국 검찰의 정도를 넘어 만행에 가깝다.

검찰은 작가의 수많은 이메일 중 작가가 모 의원과 현 정부의 정책에 대한 반감을 지인에게 털어놓는 것만을 뽑아 ‘이것이 악의로 허위사실을 유포하고자 한 흔적이다.’고 말하지만, 작가가 현 정부에 반감을 표시한 이메일을 보냈다 하여 어떻게 악의적으로 허위사실을 만들어 장관 같은 공직자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볼 근거는 되지 않는다.

검찰의 이메일 공개가 도리어 통신비밀보호법이나 피의사실공표죄를 저지른 것이라는 주장이 있는데, 그 주장의 당부를 떠나 이메일 공개는 모든 개인들, 특히 방송인들이 개인의 생각과 소신에 대해 자기검열하라고 겁주려는 것이 진짜 목적이다. 광장은 말할 것도 없고 신문과 방송, 카페와 아고라 등 공적인 공간을 넘어 이제는 일기나 이메일, 문자메시지에서도 정부에 대한 반감을 표시해서는 안 되도록 하려는 것이다. 왜? 정부의 정책에 반감을 가진 사람은 언제든지 악의로 허위사실을 유포할 사람이라서 정부 정책을 비판하는 것만으로도 명예훼손죄로 처벌될 것이니까…

작가의 이메일 공개는 다른 한편 검찰이 공익(公益)의 대표자라는 지위를 스스로 포기하고 사익(私益)의 대표자, 정권의 시녀로 전락하였음을 반증하는 명백한 징표기도 하다. 용산참사 재판에서는 당연히 피고인들에게 제공해야 할 수사기록을 법원의 명령도 거부하며 숨기고 있는 검찰이 PD수첩 제작진을 기소하면서는 재판이 진행되기도 전에 작가의 사적인 감정이 담긴 이메일을 스스럼없이 공개한 것이다. 내가 하면 로맨스고, 네가 하면 불륜인가? 원칙도 없고 일관성도 없다. 정의와 공평, 공정의 원칙은 휴지조각이고 그저 달면 삼키고 쓰면 내뱉는 정상배들과 다를 것이 없다.

뉴라이트에 속해 있다는 모 변호사는 ‘증거자료로 제출하는 이메일 공개가 무슨 문제냐?’며 검찰을 두둔한 바 있지만, 그 변호사가 용산참사의 수사기록을 법정에 내놓지 않는 검찰에 대하여 쓴 소리 한마디 하는 것을 들어보지 못했다. 더구나 모든 증거는 증거로 사용될 수 있는 자격, 즉 증거능력이 법정에서 인정될 때 비로소 얼마만큼 증거가치가 있는가를 따질 수 있을 따름이고, 증거능력조차 검증하지 않은 상태에서 검찰은 이미 여론재판을 시도한 것이다. 이는 형사소송법의 대원칙인 당사자대등의 원칙, 공판중심주의를 무력화시키는 반(反)사법행위다.

또 신 대법관의 이메일도 공개되었으므로 작가의 이메일 공개도 괜찮다는 주장도 들린다. 어떻게 작가의 사사로운 이메일 공개가 신 대법관의 이메일 공개와 같을 수 있는가? 작가의 이메일은 검사들이 압수수색이라는 을제력을 동원하여 빼앗은 것인 반면 신 대법관의 이메일은 받은 사람이 신 대법관의 재판권 침해를 거론하며 스스로 공개한 것이다. 또 신 대법관의 이메일은 신 대법관이 재판권을 침해하는 내용의 이메일을 보낸 것으로 공무에 관한 것이지만, 작가의 이메일은 지인에게 그때그때 자신의 사사로운 감정을 전한 사생활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이를 알 만한 사람이, 더구나 변호사법 제1조에 따라 ‘기본적 인권을 옹호하고 사회정의를 실현할 사명’을 지고 있는 변호사가 그런 말을 내뱉는 것을 듣고는 아연실색할 따름이다.

1,000명이 넘는 촛불집회 참가자와 미네르바 기소, 용산철거민 농성의 처참한 진압, 노 전 대통령에 대한 근거 없는 흠집내기와 뒤이은 서거, 그리고 PD수첩의 기소에 이르는 일련의 검찰권 행사가 정녕 정의와 공평, 공정의 원칙에서 이뤄진 것이라 장담할 사람은 우리 사회의 극소수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검사 안 되길 잘 했다는 생각은 일신의 안도지만, 그것이 정권의 시녀마냥 부화뇌동하는 검찰로 인한 폐악을 고쳐줄 수는 없다. ‘님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 찍으면 남이 되는 세상’이라는 된다는 노래가 있다. 공익이 아니라 어느덧 사익의 대변자가 되어버린 검찰에게 ‘사익’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 찍으면 ‘사악(邪惡)’이 된다고 말한들 귀담아 들을 리 없다는 생각이 드는 걸 보면 검찰 스스로의 자정을 구할 단계도 이미 넘어선 느낌이다. 스스로 못하면 결국은 국민이 손을 볼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