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BC의 위기와 베를루스코니의 역습

[국제] BBC의 위기와 베를루스코니의 역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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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 세계 최고 공영방송인 영국의 BBC가 창사 90주년을 맞았다. 이에 BBC는 90주년 창사 기념일을 맞아 팝그룹 블러(Blur)의 리더 데이먼 알반이 작곡한 곡인 ‘2LO Calling(콜링)’을 BBC 라디오 모든 채널과 월드 서비스를 통해 동시에 내보내며 자축하는 시간을 가졌다. 데이먼 알반의 노래인 2LO Calling(콜링)은 BBC가 1922년 11월 14일 영국 방송 유한 회사(British Broadcasting Company Ltd)로 첫 라디오 방송 시대를 열 때 사용한 최초의 송신기인 2LO에서 영감을 얻어 만든 노래다. 하지만 이러한 축제 분위기를 걷어내고 냉정한 현실의 눈으로 현상을 분석했을 때, ‘존재 그 자체가 방송의 역사를 정의’하는 BBC의 90주년은 우울하기 그지없다. 세계 최고 수준의 공영방송 능력을 자랑하는 BBC가 최근 유례없는 성추문과 오보 사건으로 초유의 위기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현지시각 10일, 취임한 지 2개월도 안 된 조지 엔트위슬 BBC 신임 사장은 “지금 자신이 해야 할 가장 떳떳하고 명예로운 일은 사건들에 책임지고 사임하는 것”이라는 입장을 밝히며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났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무려 30년 동안 BBC의 간판 진행자로 활동하며 영국 여왕으로부터 기사 작위까지 받은 지미 새빌이라는 방송인이 있었다. 그는 인기 DJ 출신으로 BBC에 입사한 후 팝 음악 전문 프로그램 및 다양한 인기 섹션들을 진행하며 큰 인기를 누렸다. 또 2011년 작고하기 전까지 청소년 대상 프로그램을 맡아 특유의 입담과 진행 센스를 발휘해 ‘BBC의 얼굴’이라는 칭송을 받기도 했다. 그런데 지난 10월 3일, BBC의 경쟁사인 ITV는 [지미 새빌의 또 다른 면]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방영해 영국은 물론 전 세계를 경악에 빠트렸다. 해당 프로그램에는 ‘방송 영웅’인 지미 새빌이 무려 30년 동안 300명이 넘는 아동들을 강제로 성폭행하고 추행했다는 확실한 증거가 포착된 것이다.

그러나 파문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작년 12월에 이미 BBC는 지미 새빌의 악행을 폭로하는 프로그램을 제작해 방영하려 했으나 당시 데스크였던 피터 리폰에 의해 제동이 걸리면서 결과적으로 방송이 불방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그러나 악몽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 같은 ‘방송 영웅’의 악행과 이를 덮기위한 시도가 모두를 놀라게 하는 동안 2일 BBC는 “집권 여당의 보수당 유력 원로 정치인이 지미 새빌과 같은 범죄를 저질렀다”고 보도한 것이다. 이 같은 내용은 국내 언론에도 실시간으로 보도되며 큰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이는 오보였다. 사실무근의 이야기를 급하게 들이댄 BBC의 패착이었던 것이다. 동시에 영국이 자랑하는 공영방송 BBC의 신뢰도는 크게 하락하고 말았으며 결과론적으로 조지 엔트위슬 사장의 사임이라는 후폭풍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이 같은 ‘BBC 최악의 위기’에서 오히려 반전의 기회를 찾았다는 이들도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 이들이 주목하는 것은 바로 조지 엔트위슬 사장이 보여주는 ‘책임지는 자세’다. 그가 의회에 참석해 한 발언을 보자. 그는 “작년 12월 당시 <뉴스나잇>의 취재 내용은 어렴풋이 인지했으나 큰 관심도 어떠한 영향력도 가하지 않았다”고 진술하며 “어떤 개입도 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즉, BBC가 자체적으로 지미 새빌을 폭로하려던 해당 프로그램의 불방이 사장이 지시한 ‘정치적 개입’이 아니라 순수한 데스크 판단 존중에서 기인했음을 알 수 있다. 사장 퇴임 전 당시 데스크였던 피터 리폰이 가장 먼저 책임지고 사임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또 결정적으로 조지 엔트위슬 사장의 퇴진에 영향을 미쳤던 BBC의 2일 방송도 이 같은 ‘데스크 판단 존중’이라는 기본적인 가치에서 발현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는 <가디언> 등 영국 언론이 실제 사장의 행적을 추적하여 당시 조지 엔트위슬 사장이 새빌 스캔들의 희생자들을 위한 외부 스케줄을 소화하는 등 방송을 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었다.

물론 공영방송의 사장으로서 BBC의 신뢰도 하락에 관한 책임은 반드시 져야한다. 또 데스크 판단이라는 큰 가치에 저널리즘의 모든 것을 맡긴 부분도 규탄받아야 하는 부분이다. 그래서 조지 엔트위슬은 사임했다. 그가 실질적인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물리적인 정황증거가 속속 드러나고 있지만, 그는 ‘사장’의 가치와 무게를 잘 알기에 스스로 물러나는 길을 택했던 것이다. 자, 이 대목에서 이탈리아로 가보자.

현지시각 2011년 11월 12일, 막강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하는 언론 장악을 통해 이탈리아를 사실상 철권통치한 실비오 베를루스 총리가 사임했다. 엄청난 성추문과 경제 파탄 위기에 따른 국민적 지탄에도 굴하지 않고 수차례 의회의 탄핵을 비껴간 ‘불사조’가 결국 날개가 꺾인 셈이다. 그동안 그는 자신의 미디어 제국을 앞세워 국민을 현혹하고 자신을 따르는 세력을 중심으로 하는 이익집단의 배를 채웠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리고 2011년 11월 12일, 그의 사임소식을 듣고 대통령궁 인근에서 ‘할렐루야’를 외치던 국민의 손에 의해 결국 역사의 뒤안길로 쓸쓸히 사라졌다. 하지만 악몽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베를루스는 퇴임 1년 후인 2012년 10월 28일 이탈리아 북부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자신이 이끄는 중도정당 PDL이 현 집권세력인 몬티 정부에 대한 지지를 철회할 수 있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이는 복잡한 유럽의 경제위기에 따른 이탈리아 국민의 몬티 정부에 대한 반발에 편승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이탈리아의 총리인 몬티는 유럽연합(EU) 경제담당 집행위원을 지내고 보코니 대학 총장을 역임한 테크노크라트(전문관료)로서 취임 당시부터 경제난 타개를 위한 적임자로 꼽혔지만, 이탈리아 국내총생산(GDP)의 126%에 달하는 국가부채를 줄이기 위해 세금을 인상하고 정부 지출을 삭감하는 한편, 연금을 개혁하는 등 긴축정책을 펼쳐와 국민의 지탄을 받아왔다. 즉 10.7%라는 살인적인 실업률에 시달리던 이탈리아 국민이 긴축안에 반대하는 폭력 시위를 전국에서 벌이기 시작했고, 이를 기회로 잠잠했던 베를루스가 다시 고개를 든 셈이다. 이에 전문가들은 탈세 혐의로 4년 형을 선고받은 베를루스가 고등법원에 이를 항소한 상황이기 때문에 내년 4월 이탈리아 총선에 베를루스가 다시 출마할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BBC 사장의 책임지는 자세와 이탈리아 전 총리의 언론장악에 이은 복귀 움직임. 이는 현재의 대한민국 미디어 환경에서 나타나는 복잡하고 추악한 현실에 시의적절한 모델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현재의 우리가 도저히 이룰 수 없는 꿈과 더불어 현재의 악몽, 미래의 끔찍함이 동시에 엿보인다고 할까. 그러나 우리가 두 다리를 딛고 당당히 서서 이 혼란스럽고 어지러운 미디어 정국을 타개할 방법을 꾸준히 모색한다면, 반드시 적절한 미래 비전을 찾을 수 있다고 본다. BBC의 가능성을 발견하느냐, 베를루스의 ‘언론장악’같은 검은 그림자에 스며드느냐는 전적으로 우리의 손에 달려있다. 그러고보니 성추문과 언론장악 및 언론통제. 누구와 많이 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