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죄’를 무시하는 사회

[칼럼] ‘원죄’를 무시하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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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도 그런기다. 처음엔 페어한 세상을 만들겠다 뭐 하겠다 하면서 정치판에 끼어들지만, 인자 니는 뭘 하겠다 하는 것도 잊어뿔고 권력을 갖겠다는 욕심만 남은기라”

 

요즘 절찬리에 방송중인 SBS 드라마 추적자의 대사다. 그리고 필자는 장담한다. 한오그룹의 서회장으로 분한 박근형 선생이 생생하고 깊은 호흡으로 뿜어낸 이 명대사는 다른 대목의 명대사와 함께 드라마를 시청하는 우리 모두의 가슴속을 휘어잡았으리라. 그것이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그런데 이 드라마의 명대사를 곰곰이 씹어보다보면, 뭔가 아차! 하며 무릎을 치게 만드는 껀수가 생긴다. 번개같이 뇌리에 스친다고 해야하나. 그렇다. 너무나 닮았다. 너무나 닮아 소름끼치게 잘 짚어낸 말이다. 이 명대사 하나에는 우리 사회의 질퍽한 진실이 담겨있다. 그것이 대단한 일이든, 조잡하고 형편없는 일이든.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부정적이면 원인이 잘못된 것이고 그 결과가 긍정적이면 원인이 좋았던 것이다. 물론 과정상의 문제가 있을 수 있겠지만 일단 그것은 차치하자.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다. 그냥 딱, 이것만 보자. 이것만 보고 판단한다면 박근형 선생님의 저 명대사가 왜 가슴절절한지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그렇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원죄’를 덮어두고 ‘파국으로 치닫는 현재’에 이르러서야 서로 다투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확실한 원죄’가 있는데 그 ‘과거의 원죄’는 보지 못하고 현재의 파생요소만 가지고 박터지게 싸우는 것이다. 그래서 박근형 선생님의 대사는 더욱 생명력을 가진다. ‘페어 플레이 하겠다고 정치판에 들어왔다가 추해져 버리는 우리들’처럼. 우리는 잘못된 현실을 직면하고는 그 잘못된 현실이 가능하게 한 ‘과거의 죄’는 무시하고 현재의 잘못된 ‘요인’들로 피를 흘리고 있다.

 

요즘 박근혜 의원의 5.16 발언이 화제다. 유력 대선주자인 그가 5.16에 대해 전향적인 이야기를 꺼내자 여야 가릴것 없이 십자포화가 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심정적으로, 그리고 지극히 이성적으로 그가 살아온 내력과 스토리들을 통해 그의 발언을 생각해보면 ‘어쩔 수 없겠구나’싶은 생각도 들지만. 단언하건데 이는 지금의 21세기 대한민국 지도자에게 걸맞지 않는 이데올로기라고 생각한다.

이 시점에서 장수장학회 이야기를 해보아야 겠다. 정수장학회. 대선정국의 박 의원에게는 뼈아픈 이름이 될 것이다. 하지만 예전의 박 의원에게는 그렇지 않았으리라. 아니, 오히려 안정적인 재원을 가능하게 해준 사유적 장치로서 그 안에서 포근함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안의 스토리, 즉 결과는 비참하고 처절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부일장학회를 불법적으로 몰수해 5.16 장학회로 바꿔버렸고, 전두환 신군부 시절 이는 정수장학회라는 이름으로 박근혜 의원의 사유물이 되었다. 그 과정에서 관련된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눈물이 지금도 마르지 않았음은 당연하다. 이것이 정수장학회 과거의 ‘원죄’이자 ‘팩트’다.

자, 이런 상황에서 박근혜 의원에게 5.16에 대한 평을 해달라고 하면 어떤 반응이 나올까? 군사정권의 불법 부산물에서 비롯된 정수장학회의 이사장을 지내며 지금까지도 ‘연계 가능성’이 농후한 박 의원에게 현재의 시점에 과거의 평을 묻는다면? 어쩌면 답은 이미 정해져있다. 결과는 똑같은 것이다.

우리는 이 부분에서 과거의 ‘원죄’를 더욱 부각시켜야 할 필요가 있다. 비록 박 의원이 자신의 의지대로 독재자의 딸로 태어난것이 아니며, 그가 원해서 여자로 태어난 것이 아니지만 과거의 원죄로 인한 현재의 불합리함은 과거에서 풀어나가야 하는 것이다. 현재에서 벌어지는 파국의 현장을 극대화시킨다고 해도 이미 답은 한가지일 뿐이다. ‘과거의 원죄’부터 시작한 전방위적 의견개진이 바로 지금의 정수장학회 문제에 접근하는 방법이다. 다행히 최근 이러한 시도가 몇몇 분야에서 이루어지고 지고 있어 다행이다. 현재 정수장학회의 부당함을 부르짖고 개정을 요구하는 목소리와 함께, [미디어스]의 정수장학회 과거 ‘포커스’는 의미가 깊다. 5.16에 대한 박근혜 의원의 현재 느낌에 대한 발언은 참고사항으로 넣어두자. 5.16과 관계된 과거의 ‘원죄’부터 시작해 논의의 끝이 박 의원에게 향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해법’이다. 단순한 정치적 공세를 버리고 현명하게 대처하자. 박 의원도 의식있는 정치인으로서 충분한 준비가 되리라 믿는다.

 

미디어렙 문제를 보자.

최근 미디어렙 문제를 둘러싼 논쟁이 한창이다. 방통위가 OBS의 현행 미디어렙 방침을 고수하고 최민희 민주통합당 의원은 MBC 독자 미디어렙 문제에 불을 지피고 있다. 시끄럽다. 정신이 없고 혼란스럽다.

그런데 여기서 종합편성채널에 대한 논의가 쏙 빠져있다. 사실 미디어렙 문제는 종편 때문에 불거진 것인데, 종편에 대한 이야기는 없고 현재 미디어렙 문제에 대한 피터지는 갈등만 부각되고 있는 형국이다. 이 또한 문제가 많다. 정신을 차리고 미디어렙 문제가 벌어진 ‘원죄’를 보자. ‘원죄’는 종편이 가지고 있다. 그들이 야기했고, 그들이 미디어 시장을 교란했기 때문이다. 제발 현재의 갈등만 쳐다보지 말고.

 

주파수 논의도 빼놓을 수 없다. 지금 통신사는 데이터 트래픽 해소를 이유로 1.8/2.6GHz 대역 주파수는 물론 전국 디지털 전환을 앞둔 700MHz 대역 주파수까지 노리고 있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현재의 우리들은 통신사의 모바일 트래픽을 막기 위한 주파수 공급은 당연하게 생각하면서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한 고민은 없다. 통신사의 묻지마 무제한 데이터 요금제로 인해 주파수 낭비가 심화되었던 과거는 잊고, 지금 당장 주파수를 밀어주기만 바쁘다. ‘원죄’ 즉 ‘사태의 원인’을 파악하지 못한 단순한 생각이 지금의 망중립성 문제와 주파수 할당 논의를 일으켰다고 볼 수 있다.

 

과거를 보지 않고 현재의 ‘파국’에만 집중하면 문제 해결의 가능성은 요원해진다. 그런데 지금 2012년의 우리는. 현재를 있게 만든 과거를 무시하고 현재의 불합리성에 대해서만 피를 흘리고 있다. 어리석고 황당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