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과 통하다, EBS 국제다큐영화제

[기고] 세상과 통하다, EBS 국제다큐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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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희 ㈜마음에드는영화사

2015년 한국 영화계 최대 화제는, 올해 첫 천 만 관객을 돌파한 <국제시장>도, <암살>이나 <베테랑>도 아니다. 그 주인공은 어느 노부부의 사랑과 죽음의 이야기를 담아낸 다큐멘터리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다. 대작들이 즐비한 극장가에서 제작비 1억 2천만 원의 저예산 다큐멘터리 영화가 480만 관객과 만날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이 영화는 5년 전 296만 명의 관객을 모은 <워낭소리>를 연상시킨다. 두 영화 모두 다큐멘터리로서 예상하지 못한 성공을 거뒀다. 일반 상업영화(극영화)와 비교했을 때, P&A (Print&Advertisement:광고·홍보) 비용을 거의 쓰지 않고 입소문만으로 본 승부다. 즉, 관객들이 잘 만들어진 다큐멘터리를 찾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왜 다음 흥행까지 5년이나 걸렸을까?

안타깝게도 다큐멘터리는 극장가에서 접하기 쉽지 않다. 1990년대엔 변영주 감독의 <낮은 목소리> 시리즈 정도 밖에 없었다. <워낭소리> 이후 <송환>, <우리 학교>, <울지 마, 톤즈> 등이 알찬 성과를 거뒀지만 큰 변화를 가져오진 못했다. 극영화에 비해 윈도우 빈곤이 심각한 상황이다. 국내영화제 가짓수가 100이 넘어가지만 그 중 다큐멘터리 영화제는 단 3개뿐이다. 평화, 소통, 생명을 주제로 한 EMZ 국제다큐영화제와 실험, 진보, 대화의 인디다큐페스티발. 그리고 다큐멘터리의 대중화를 위해 만들어진 EBS 국제다큐영화제(이하 EIDF)가 있다. 다큐에 허기진 관객들로 인해 이미 수많은 마니아를 확보한 EIDF가 8월 24일부터 30일까지 광화문 일대에서 열렸다.

EDIF는 2004년 8월, ‘변혁의 아시아’라는 주제로 출발해 올해 12회를 맞았다. 지상파 TV채널이 일주일 내내 정규 프로그램 대신 다큐멘터리로만 방송 시간을 채운다는 파격적인 시도 덕분에 11년이 지난 지금, EIDF는 어느덧 국내 시청자뿐 아니라 다큐멘터리에 관심을 가진 세계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영화제로 성장했다.

EDIF의 올해 캐치프레이즈는 “세상과 통하다 Connecting with the World”이다. 나날이 파편화 되는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점차 개인의 삶과 타인의 삶, 나와 공동체의 관계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잃어간다. 그러나 우리는 다큐멘터리를 통해 세상 곳곳을 볼 수 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삶만큼이나 다양한 다큐멘터리를 통해 소외되고 고립된 개인의 삶을 넘어선 다양한 삶과 가치관이 공존하는 사회를 꿈 꿀 수 있다. “세상과 통하다”라는 EIDF의 슬로건은 무너져가는 공동체적 가치를 복원하고 다양한 생각이 존중 받는 세상에 대한 비전을 담고 있다.

캐치프레이즈에 걸맞게, 상영작품들이 보여준 세상에 대한 관점은 참으로 다양했다. 그중에서도 경쟁부문에 해당하는 ‘페스티벌 초이스’에서 화제가 됐던 두 작품, <툭툭>과 <침팬지 콤플렉스>가 세상에 던지는 물음표는 특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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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에선 ‘툭툭’으로 불리는 삼륜차가 서민의 교통수단으로 널리 이용되고 있다. 꽉 막힌 길을 요리조리 빠져나가고, 택시가 다닐 수 없는 골목길을 자유자재로 달린다. 그러나 어디나 갈 수 있는 툭툭은 어디서든 문제를 일으키는 주범이 됐다. 법규를 무시한 채 도시를 휘젓고 다니면서 교통체증과 사고를 유발한다. 2005년 동남아에서 처음 들여온 툭툭은 차도 오토바이도 아닌 불법 개조물 취급을 받는다. 영업행위도 할 수 없지만, 실업해소와 시민의 편의를 명분으로 정부가 눈감아 주면서 도시를 점령했다. 면허가 따로 필요 없다 보니, 열 살 남짓 소년들까지 생계를 위해 툭툭을 몬다. 영화 <툭툭>은 바로 이 툭툭을 몰며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10대 소년들의 일상을 담아냈다.

영화는 번잡한 이집트 시내를 부감(높은 위치에서 피사체를 내려다보며 촬영)으로 스케치하며 시작한다. 햇빛 가득한 거리가 담긴 화면을 가로지르며, 압달라와 샤론, 그리고 비카는 자신들의 툭툭에 태울 손님을 찾아 달린다. 이 소년들은 수염은커녕 운전면허도 없을 정도로 어리지만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학교가 아닌 거리로 나왔다. 아침 6시부터 새벽 1시까지 일해 100파운드(1만 5천원)을 벌어, 그 중의 절반은 툭툭을 살 때 빌린 대출이자를 내는데 쓴다. 일자리를 빼앗기고 취업도 힘든 부모들은 마약과 폭력으로 거리를 헤매는 것보다 돈을 버는 게 낫다고 변명한다. 그 순간, 소년이 말한다. “제 미래는 보장이 안 되죠.”

이집트의 연일되는 시위, 정치적 불안정과 경제적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은 모두의 삶을 힘들게 하지만 특히 어린 소년들에게는 더욱 가혹하다. 학교에 가면 돈을 내야 되지만 일을 하면 돈을 벌 수 있다는 이유로 학교가 아닌 거리로 나와야 했다. 그렇게 거세당한 어린 소년들의 미래는 이집트 거리 곳곳을 부유한다. 영화의 앰비언스 사운드(ambient sound:대사, 음악, 특수 음향 효과 등과 같이 작품에 쓰인 소리가 아니라 촬영 현장에서 나는 모든 배경 소리)는 자동차 경적소리로 가득하다. 화사하던 이집트의 거리에서 시작한 영화의 시선은 점차 흉폭하고 위험한 거리까지 이른다. 그곳이 소년들의 터전이다.

<툭툭>의 표현과 형식은 새롭지 않다. 다만 끊임없이 아이들과 대화한다. 담담하지만 직설적이기에 대담하다. 소년들을 쫓아가는 카메라가 담고자 한 것이 소년들의 고된 일상이라는 괄호 안에 숨은 소년들의 미래라는 것을 눈치 챌 수 있다. 경찰과 좀도둑들, 그리고 택시들에게 괴롭힘을 당하지만 소년들은 노래, 담배, 게임 등 잠깐의 즐거움을 찾고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며 하루하루를 견딘다.

살아온 날보다 앞으로 살날이 많은 소년들은 잃어버린 가능성을 찾을 수 있을 것인가? 너무 빨리 어른들의 세계로 쫓겨나, 어른처럼 말하고 사고하는 소년들의 모습이 가슴 저민다. 경적이 끊이지 않는 거리 위에서 하루하루를 아슬아슬하게 버티는 소년들을 통해, 다르지만 비슷한 이유로 거리 위에 서있을, 수많은 어린 존재들이 짊어질 미래를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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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침팬지 콤플렉스>는 네덜란드 동물 구조 센터를 배경으로 한다. 심리적인 문제가 있는 침팬지에게 재활 치료를 해주는 곳이다. 이 침팬지들은 일반 가정이나 실험실, 서커스단에서 사람 손에 길러졌기 때문에 센터에서 난생 처음으로 다른 침팬지와 만나게 된다. <침팬지 콤플렉스>는 심리적 문제가 있는 침팬지가 이를 극복하고 동족과 생활하는 방법을 다시 배우는 과정을 보여준다. 동물이 동물답게 사는 방법을 전문가들이 모여 토론을 통해 가르치는 과정은 역설적이다.

영화의 포문을 여는 질문은 다음과 같다. “침팬지와 인간을 구분하는 기준이 무엇인가.” 간단한 질문처럼 보이지만, 네덜란드 구조 센터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겐 쉽지 않다. 주인공인 침팬지 모조는 40년 동안 고립되어 인간 손에 자랐기 때문에 다른 침팬지를 만나면 충격을 받는다. 거기다 매일 포도주와 맥주를 먹인 탓에 알콜 중독과 우울증 증세까지 보인다. 모조가 사람처럼 앉아서 텔레비전을 보며 스파게티를 먹고 코카콜라를 마시는 모습은 참으로 기묘하다.

전문가들은 둘러앉아 침팬지가 침팬지다워 질 수 있는 방법에 대해 토론한다. 이 과정에서 감정적 대립 및 윤리적 문제가 발생하면서, 인간과 영장류 사이의 모호한 관계가 드러난다. 한 전문가는 동물의 행동을 오해하지 않기 위해서 인간의 기준으로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침팬지가 인간과 다양한 교류를 하더라도 결국 침팬지는 침팬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은 동물을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도구이기도 하다. 주체가 인간일 때, 인간의 관점이라는 한계를 뛰어넘어 다른 종을 이해하는 것은 과연 가능한 일일까?

그러나 모조의 치료가 실패로 끝났을 때, 안락사가 대두된다. 사회적 동물인 침팬지가 매일 같이 혼자 지내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이다. 전문가는 ‘사람처럼’ 침팬지도 고립된 채로 살아가선 안 된다고 말한다. ‘사람처럼’이라는 이유가 <침팬지 콤플렉스>를 관통하는 순간이다.

영화의 시퀀스(sequence:특정 상황의 시작부터 끝까지를 묘사하는 영상 단락 구분) 중간마다 클로즈업된 침팬지의 표피가 등장한다. 그리고 숨소리가 들린다. 존재하는 것, 그 자체에 대해 재단하고 판단하는 것은 인간이 범하는 가장 흔한 잘못일 것이다. 영화 말미, 우리 안의 카메라를 쥐고 흔들던 침팬지가 카메라를 우리 밖 인간을 향해 돌렸을 때, 창살 밖 인간의 모습이 섬뜩하게 보인다.

“영화 좋아하세요?”라고 물으면, 대부분 대답이 긍정적이다. 그러나 다큐멘터리에 대해 물으면 말끝이 흐려진다. EBS국제다큐영화제는 우물 안 한국다큐영화계의 사다리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