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준상 칼럼>지상파방송의 종말인가, 새로운 저항의 시작인가?

<조준상 칼럼>지상파방송의 종말인가, 새로운 저항의 시작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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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파방송의 종말인가, 새로운 저항의 시작인가?

 

지상파방송과 종합편성채널은 경쟁 관계에 있다. 이 전제 아래에서 방송통신위에 다음과 같은 물음을 던져 보자.

"종합편성채널에 왜 의무편성(송신) 지위를 주는가?"

이에 대해 지금까지 방통위는 ‘은근한 무시’로 일관해 왔다. 그럼에도, 한 가지 예상할 수 있는 답변은 ‘현행법에 보장돼 있다’는 것이다. 수백만 유대인에 대한 나치의 홀로코스트의 저변에 깔린 심리도 바로 이것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전후 유럽의 수많은 지식인들이 ‘영혼 없는’ 기계의 톱니바퀴가 굴러가는 ‘기술적 합리성’에 근본적이고 비판적인 성찰을 하게 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깊이 들어갈 필요도 없이, ‘현행법이 보장하고 있어서’ 라고 답변하기엔 체면이 서지 않는다. 물론 남아있는 체면조차 있기나 한지도 의문이지만, 이런 식으로 바닥을 드러내기는 싫을 것이다.

예상 가능한 좀 더 품격(?) 있는 답변도 가능하다. 이를테면 ‘후발 사업자를 위한 비대칭 규제’라든가, ‘지상파방송이 독과점하고 있는 방송 여론시장에 다양성을 도입하기 위해’ 등과 같은 대답이 여기에 해당한다. 하지만 방통위가 이런 답변을 하기 위해서는 ‘의무(재)송신’이라는 제도의 목적이 바뀌었음을 먼저 설명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 케이블을 통한 지상파방송 의무재송신 제도가 도입된 목적은 ‘케이블의 공익성 확보’와 ‘난시청 해소’이다(92헌마200). 1991년 12월 처음 도입될 당시 KBS와 EBS에 대해서만 이 제도가 적용됐고, 지금은 KBS1과 EBS 두 채널로 적용되는 채널이 더 적어졌다. 이들 채널의 성격을 따지자면, 공영방송의 채널들이다. KBS 1, 2 채널 모두에 적용하지 않은 이유는, KBS 1 채널이 광고를 하지 않는다는 특성 때문이다. 하지만 이 기준에 따르면 광고를 하고 있는 EBS 역시 적용이 돼서는 안 된다.

이 두 가지 목적 중에서 종합편성채널에는 난시청 지역 시청자의 이중부담(수신료와 시청료)을 덜기 위한 목적 자체가 적용될 수 없다. 종합편성채널은 유료방송 가입자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종합편성채널에 적용 가능한 목적은 ‘시청자 복지’라고 할 수 있다. 종합편성채널을 볼 수 있는 시청자의 권리를 보장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남는 문제는 종합편성채널에 어떤 공익성의 책무를 지울 것인가 하는 점이다. 종합편성채널의 공익성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 하는 게 문제에 대해 방통위가 답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방통위는 ‘지상파방송이 독과점하고 있는 방송 여론시장의 다양성 확보’라는 답변을 할지도 모른다. 이에 대해서는 국민의 정부와 참여 정부 10년 동안 ‘지상파방송 3사의 뉴스 프로그램의 논조가 매우 동일했다’는 경험적인 증거가 없으며, 방통위가 이를 제시한 바도 없다는 비판으로 대신할 수 있다.

설사, 시청자 복지를 위해 종합편성채널의 의무송신 지위를 보장한다는 방통위의 논리를 수용한다고 해도,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그런 논리대로라면 적어도 형평성 차원에서 모든 지상파방송에 의무송신 지위를 부여해야 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바로 여기서 발생한다. 이럴 경우, 수도권의 지상파방송은 케이블이나 위성방송을 통해 전국을 대상으로 프로그램을 내보낼 수 있다. 이럴 경우, 지역 지상파방송의 방송권역은 아무런 의미도 없어지고, 지역 지상파방송에 대한 어떠한 지원 대책을 내놓아도 ‘언 발에 오줌 누기’에 그치기 쉽게 된다.

이렇게 보면, 미국의 경우 지역 지상파방송이 유료방송과 균형 발전할 수 있도록 돕는 차원에서 도입된 의무송신 제도가 한국의 경우에는 지역 지상파방송을 ‘죽이는’ 제도로 변질되는 꼴이다. ‘시청자 복지’라는 명분으로 종합편성채널에 의무송신 지위를 주는 정책이 갖는 거대한 함의가 바로 여기에 있다. 겉으로 보기엔 수도권 지상파방송에게 꽃놀이패를 쥐어주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방통위가 ‘은근한 무시’로 일관하고 있는 이 정책은 한 가지 간과하는 게 하나 있다. 수도권 지상파방송이 이런 식이라면, 굳이 자체 네트워크를 지닌 ‘지상파방송’일 필요가 무엇이 있느냐는 의문이 그것이다. 차라리 모든 지상파방송을 전국을 대상으로 한 종합편성채널로 전환하는 게 낫다는 반발이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속에서 수백만 서민의 시청권, 특히 시청권은 은 체계적으로 무시당하는 길을 걸을 수밖에 없게 된다. 대안의 방송을 설립하기 위해 기존 지상파방송 주파수 환수 운동이 벌어질지도 모를 일이다. 방통위의 정책은 이를 둘러싼 일대 갈등을 예고하고 있다. 지상파 디지털 전환 과정은 이를 촉발시키는 화약고가 될 폭발력을 지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