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기술저널 백선하 기자] 2013년 넷플릭스는 편당 400만 달러를 투자한 자체 제작 콘텐츠 ‘하우스 오브 카드(House Of Cards)’로 미국 방송계를 뒤흔들었다. 시즌 전회를 한 번에 공개해 스트리밍과 몰아보기라는 새로운 시청 트렌드를 만들었고 “I am Netflixing”을 동사처럼 사용하는 환경을 구축했다. 이 같은 변화를 가져올 콘텐츠 제작이 국내에서도 가능할까.
CJ헬로비전과 합병한 SK브로드밴드는 3월 8일 오전 서울 중구 SK텔레콤 본사에서 기자 간담회를 갖고 주문형 비디오(VOD) 콘텐츠 제작에 뛰어들어 ‘한국판 하우스 오브 카드’를 만들겠다고 밝혔다.
SK브로드밴드는 이날 이 같은 내용을 담은 CJ헬로비전 합병 법인의 콘텐츠 투자 계획에 대해 발표하면서 앞으로 1년 동안 총 3,200억 원 규모의 펀드를 조성해 콘텐츠 제작사 등에 집중적으로 투자할 것이라고 말했다.
펀드는 합병 법인이 1,500억 원을 출자하고 1,700억 원은 투자 유치를 통해 조달한다는 계획이다. 또 이후 1,800억 원을 재투자해 5년 동안 총 5,000억 원가량을 콘텐츠 산업에 투자한다는 방침이다.
이렇게 조성된 펀드는 VOD 전편을 사전 제작해 유료 플랫폼에서 동시 개봉하는데 활용된다. SK브로드밴드는 CJ헬로비전과의 합병으로 확대된 가입자 기반을 활용해 VOD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콘텐츠 유통 경로를 마련하고 시즌제 등 새로운 포맷의 콘텐츠를 선보일 예정이다.
이인찬 SK브로드밴드 사장은 “이번 펀드가 국내 콘텐츠 산업 발전과 성장을 위한 촉매제가 될 수 있도록 단기간 대규모 투자를 하기로 했다”며 “한국판 하우스 오브 카드와 같은 성공 스토리를 만들어 역동적인 콘텐츠 생태계를 조성하겠다”고 말했다.
투자 항목별로 보면 3,200억 원 중 중 2,200억 원은 콘텐츠 분야에 투자되고 1,000억 원은 스타트업 지원에 쓰인다. 우선 △글로벌 한류 드라마와 다큐멘터리 등 VOD 오리지널 콘텐츠 제작에 1,200억 원 △멀티채널네트워크(MCN)와 가상현실(VR) 등 뉴미디어 콘텐츠에 600억 원 △국내 제작사들의 해외 진출에 600억 원을 투자하고, 2200억 원의 펀드 운영을 통해 제작된 콘텐츠는 국내외 유료 플랫폼 및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에도 제공할 계획이다.
SK브로드밴드 측은 “기존에 인기 TV 프로그램이나 최신 영화 중심으로 VOD 콘텐츠를 제공했다면 합병 법인은 개봉한 지 오래된 영화, 교육 및 다큐멘터리, 어린이 애니메이션 등 콘텐츠 종류도 확대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날 기자 간담회에 참석한 강유신 시너지미디어 대표이사는 “합병으로 가입자 규모가 2배로 커지고 투자도 확대됐기 때문에 국내 제작사들의 제작 환경 개선과 해외 시장 진출 기회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경쟁사인 KT와 LG유플러스는 SK브로드밴드의 이 같은 계획이 공허하다고 지적했다.
KT와 LG유플러스는 같은 날 공동 입장문을 통해 “SK브로드밴드의 3,200억 콘텐츠 펀드 조성 발표는 CJ헬로비전 인수합병과의 연관성을 찾기 어렵고 공허한 펀드 조성 액수만 되풀이할 뿐 콘텐츠 생태계 활성화와는 무관한 내용”이라고 비판했다.
양사는 방송통신 독점화가 우려되는 인수합병은 자진 철회하는 한편 기업으로서 투자 활성화 책무를 다해야 할 것이라고 부연했다. 이들은 “인수합병을 전제로 이를 추진하겠다는 것은 방송통신에 이어 콘텐츠 유통 시장 독점화를 통해 자사 미디어 플랫폼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목적이라고 밖에 해석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어 “콘텐츠 생태계 활성화를 명분으로 내세우고 있지만 실은 미디어-콘텐츠 산업 간 배타적 협력 관계를 강화하겠다는 것으로 자사 미디어 플랫폼에 콘텐츠를 수급하는 업체에게만 혜택이 국한돼 콘텐츠 산업의 미디어 자본 예속을 급격히 심화시킬 것”이라고 꼬집었다.
특히 양사는 SK브로드밴드의 실질적인 투자 금액은 1,500억 원으로 나머지 1,700억 원은 직접 투자가 아닌 펀트 형식의 외부 투자 유치로 이 정도 금액은 기존 SK브로드밴드에서 진행해온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덧붙였다.
이에 따라 양사는 “결국 이번 계획은 미디어 콘텐츠 생태계에 비정상적인 쏠림으로 생태계가 황폐화될 것이며 SK텔레콤의 지배력 확대를 통한 독점 강화 차원으로밖에 볼 수 없어 심히 유감”이라고 강조했다.
시민사회단체 관계자 역시 KT와 LG유플러스의 의견에 공감을 표하며 “그동안 SK텔레콤과 SK브로드밴드가 보여준 행태를 미루어 볼 때 이들이 밝힌 콘텐츠 투자가 제대로 이뤄질지는 의문”이라면서 “한국판 하우스 오브 카드는커녕 기존 콘텐츠 제작 환경을 무너뜨리는 건 아닌지 우려스럽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