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기술저널] 얼마 전, 지인이 ‘루트 128’을 아느냐고 물어봤다. 처음에는 ‘128의 제곱근(root)을 의미하는 줄 알고 11이나 12 사이의 어떤 수일 텐데 왜 물어보지’하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을 한가하게 물어볼 정도의 사람은 아니어서 얼른 지인 몰래 스마트폰의 N모 포털에서 해당 단어를 검색해봤다. ‘루트 128’은 미국 보스턴의 동북부 외곽에서 시작해서 서남쪽에서 끝나는 도로라고 한다. 보스턴은 동부가 대서양에 접해 있으므로 보스턴의 외곽 대부분을 감싸고 있는 도로이다. 더욱 더 검색을 해나가니 M경제신문의 김인수 기자가 쓴 기사 중 일부에도 관련 내용이 나오는 것을 알게 됐다. 해당 기사 등을 보고 나니 이미 ‘루트(Route) 128’은 도로 그 자체보다는 하나의 개념화 된 단어임을 알게 되었다.
1980년대 미국 벤처기업들이 보스턴 외곽의 128번 도로 주변에 많이 생겼으며 그 결과로 미국의 기술 고속도로(America’s Technology Highway)라고 불렸던 이 지역에는 DEC, Data General, Wang, Prime Computer 등 왕년에 잘 나가던 기업들이 다수 포진해 있었다. 하지만 이들 기업들의 특징은 과거에는 IT기업으로 잘 나갔지만 지금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들 기업이 사라진 이유는 기술을 전파하지 않고 기업 내부에서만 유통되는 폐쇄적이고 수직적인 환경을 유지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와는 반대로 실리콘밸리가 잘 나가는 이유로는 기술 확산 및 공유에서 그 단서를 찾고 있다. 실리콘밸리에서는 직원이 나가서 창업을 하는 것을 기술유출로 보기 보다는 관련 생태계가 커지는 것으로 여긴다고 한다. 새로 창업을 한 직원을 도와주기도 하고, 혹시 실패하면 다시 직원으로 받아주는 고용의 유연성을 갖추고 있다고 한다. 실리콘밸리가 위치하고 있는 캘리포니아주에서는 법률적으로도 직원의 퇴직 및 창업을 기술유출로 단정해 막을 수 없게 했다. 이러한 열린 생태계가 아이디어를 창출하고 그 아이디어가 확산되는데 큰 도움이 된 것이다. 그래서인지 구글이 나가서 창업하려는 직원을 가로 막았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없다. 물론 구글 입장에서는 나가서 창업하겠다는 직원을 가로 막으면 그 직원이 나중에 성공해서 복수할까 봐 안 막았을 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파이를 키우는 것이 먼저라는 개념을 갖고 있는 곳이 실리콘밸리인 것이다.
이러한 개념에서 볼 때 애플이란 회사는 실리콘밸리에서 좀 독특한 회사 같아 보인다. 실리콘밸리에 위치하고 있지만 특허에 집착하고, 특허를 통해 경쟁자들을 미리 솎아내는 일정 부분 폐쇄적인 시스템을 갖고 있어서 실리콘밸리와 루트 128의 개념을 겸비한 회사인 것 같다. 그래서 감히(?) 애플에 대들었다가 큰 코 다친 기업들이 많이 있다. 왜 먼눈팔다가 맞으면 준비하고 맞을 때보다 더 아프지 않았던가?
각설하고 우리는 어떠했는가? 혹시 위피(WiPi)를 기억하는가? 와이파이(WiFi)가 아니다. 국내 휴대전화에서 사용하던 무선 인터넷 프로토콜 표준인 위피. 전 세계에서 우리만 열심히 사용하던 그 표준으로, 국내에서는 외산 휴대전화의 모바일 인터넷 접속을 먹통으로 만들어 버렸던 바로 그들만의 리그 표준. ‘루트 128’과 위피는 철저히 닮아 있었다. 따라서 우리나라는 당시 외산 휴대전화의 무덤이 돼버렸다. 물론 그 배타성으로 만든 탄탄한 내수시장이 지금의 글로벌한 휴대폰 시장에서 우리가 선전하게 된 배경이라고 말하면 더 이상 할 말은 없지만.
지금은 예전보다는 많이 나아졌다지만 기업체의 직원이 나가서 새로이 창업을 한다면 기업 입장에서는 경쟁업체의 출현인가 하고 색안경을 쓰고 바라보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러나 이제는 기술 확산이나 공유를 통해 세계는 공유경제의 시대로 나아가고 있다. 기술을 공유함으로써 개발시간을 절약하고, 그만큼 뉴 비즈니스의 등장속도는 점점 더 빨라지고 있다. 대부분 등장만큼이나 소멸도 빨라지므로, 또 새로운 비즈니스를 창출하기 위해서는 다시 또 다른 기술을 공유할 수밖에 없다. 일례로 ‘우버X’는 전 세계적으로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지만, 유사하지만 다른 공유 기능을 장착한 모바일 ‘카 쉐어링’ 비즈니스는 계속해서 등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방송사나 방송기술계는 ‘루트 128’과 같은 우를 범하고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 볼 때이다. 방송사에서 대규모 시스템통합(SI) 과제를 담당했던 사람이라면 시스템 구축을 완성하고 과제가 끝나고 나서 지난 선택들 때문에 괴로워한 경험이 있었으리라 본다. 혹시 한 번도 없었다면 정말 천재거나, 아니면 무엇이 잘못이었는지 아직도 모르고 있거나. 예를 들어 대규모 영상 데이터를 다뤄야 하는 NPS(Networked Production System)나 Storage 기반 송출시스템 등의 SI 분야는 개개 방송사를 넘어서 정보, 기술 및 경험의 공유가 절실한 부분이다. SI 업체들도 방송사 프로젝트는 대부분 처음 해보는 과제이고, 방송사 영상데이터의 규모가 이전의 OA시스템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이므로 어쩌면 ‘순간’의 선택이 ‘최소 10년 이상’을 좌우할 것이다. 이전에는 ‘남의 불행’이 대부분 ‘나의 행복’이었다. 그러나 ‘리먼 브라더스(Lehman Brothers) 사태’가 전 세계에 미치는 영향을 보았듯이, 이제는 남이 꼭 남이 아닌 시대가 돼버렸다. 이러한 것들은 일정 부분 초연결(Super-connectivity) 시대의 어두운 그림자일 것이리라. 예전부터 처음에는 상상할 수 없는 결말에 이르는 이른바 ‘나비효과’는 있었겠지만 그 날개 짓의 전파속도는 점점 더 빨라질 것이고, 기술 공유를 통해 개발의 속도를 내지 않으면 왜 망했는지도 모른 채 소멸될 지도 모른다.
무엇보다도 기술 공유를 위해서는 먼저 기술을 개방하는 오픈 마인드가 전제돼야 할 것이다. 그래서 이 글을 맺으면서 ‘개방(공유)하자, 절대 개방(공유)하자’를 짧은 실력이지만 영문으로 만들어 봤다. ‘Open, Do Open’ 그런데 만들고 나니 왠지 군대에서 많이 듣던 용어가 오버랩 된다. “까, 까라면 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