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있었던 종합편성채널 재승인 정국에서 우연히 이완기 민주언론시민연합 정책위원장을 만났습니다. 정신없는 기자회견장에서의 짧은 만남이었지만, 당시 이 정책위원장의 무뚝뚝하고 강렬한 눈빛은 꽤 불편했습니다. <방송기술저널>이 기술쪽 현안에만 매몰되어 공정한 언론 환경에 대한 관심이 부족하다는 지적은 의외로 뼈아프게 폐부를 찔렀으니까요.
그날 이후로 의식적으로 미디어 환경에 대한 취재를 챙겼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방심위가 레이더망에 걸려들었고(방심위의 최근 논란을 보면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자연스럽게 박만 방심위원장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했던 몇몇 분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분들에 따르면, 박만 위원장은 딱딱하고 무시무시한 공안 검사의 이미지와는 달리 의외로 농담을 즐길줄 아는 ‘젠틀맨’이라고 합니다. 21회 사법시험에 합격해 검사의 길을 걸었던 그는 출입 기자들과 유일하게 농담을 주고 받으며 친밀감을 쌓았던 인사로 여겨집니다. 특히 공안검사로서 최고의 경력을 쌓아가던 절정의 시기, 당시 좌우논란이 벌어지던 <소설 태백산맥>을 모조리 읽었다고 기자들에게 당당히 말하기도 했답니다. 물론 ‘정독은 아니고, 지하철에서 봤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유쾌하고 활달했던 그는 2003년 참여정부 시절 당시 대표적인 공안사건인 송두율 사건의 중심에 서며 인생의 롤러코스터를 경험합니다. 당시 사건을 지휘하던 박만 위원장은 노무현 대통령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수사를 강행해 결국 1심에서 이겼습니다만, 2004년 2심 재판부는 송 교수의 혐의를 대부분 무죄로 판단했습니다. 이게 결정타였습니다. 박만 위원장은 2005년 검사장 승진에서 탈락했고, 결국 옷을 벗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그는 자신이 정권의 탄압을 받았다고 술회하기도 했죠.
그러나 은둔 후 2년이 지난 2007년, 박만 위원장은 갑자기 언론계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당시 새누리당이 그를 KBS의 이사로 추천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당시 정연주 KBS 사장의 퇴진을 선두에서 이끌어 내며 강렬한 인상을 남깁니다. 물론 거대 권력에 말입니다. 이윽고 그는 2011년 방심위의 수장이 됐습니다. 방심위원장은 장관급이니 따지고 보면 엄청난 출세를 한 격이지요.
한 사람의 인생을 재단하는 것만큼 위험한 일은 없습니다. 하지만 감히 박만 위원장을 생각해 본다면, 그는 유쾌한 위트와 유머로 무장하고 충실하게 자신의 길을 걷는 엘리트로 보입니다. 허술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경직되지도 않은 사람. 적당히 풀어지고 적당히 조여진 상태에서 상당한 능력을 발휘하는 엘리트. 물론 저 만의 생각은 아닙니다. 박만 위원장을 기억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의 능력만큼은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그 안에 불길한 ‘공포’가 어른거리긴 했지만요.
박만 위원장을 포함한 방심위 위원 9명은 5월 8일 임기가 끝납니다. 방통위와 비슷하게 상당수의 인사가 물갈이 될 것으로 예상되는 상황에서 방심위 내부도 꽤 시끄럽다는 이야기가 들립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서 박만 위원장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능수능란한 엘리트인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요? 마지막에 이르러 박만 위원장과 인연을 맺었던 분의 술회가 결정적일것 같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다 할 것이다” 갑자기 무서워집니다.
(‘수첩’은 취재 과정에서 겪었던 인상적인 사건을 편안한 형식으로 서술해 사안에 대한 이해와 배경을 더욱 쉽게 알려드리는 코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