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기술저널=최기창 EBS 방송기술인협회 회장] 17세기 오스만 제국에서 네덜란드로 건너온 튤립의 인기는 대단했습니다. 특히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줄무늬가 있는 화려한 튤립은 황제 혹은 장군의 이름으로 불리며 10배로 가격이 폭등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현금이나 실물 없이 선물로 매매되던 상황은 머지않아 거품이 꺼지게 되면서 많은 피해자를 낳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당시 시대상이 반영된 해프닝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중세 유럽에서는 대장장이가 마을 공동체에 꼭 필요한 핵심 직업군 중 하나였습니다. 쟁기, 못, 낫 등 농사에 필요한 농기구들을 제작하므로 장원공동체의 생존과 직결되는 직무였습니다. 또한 갑옷과 말의 편자를 공급하기 때문에 국방력과 관련해서도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습니다. 주민들의 썩은 이를 뽑아주는 치과의사 역할도 겸했다고 하니 가히 만능이라 할 수 있었겠습니다. 세월이 흐른 후 대장장이는 우리 주위에서 흔히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튤립과 대장장이 모두 시대에 따라 쓰임새가 다름을 보여줍니다. 튤립은 당시 네덜란드 경제에서 중요한 재화였고 대장장이도 중세 유럽에서 필수 불가결한 생산요소였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튤립은 화훼의 한 종류일 뿐이고, 야장(冶匠)은 일상에 사용되는 철기류들을 공장에 넘겨주고 말았습니다.
이와는 조금 다른 사례도 있습니다.
도서관 사서의 경우 과거에는 도서를 구입하고 분류하는 것이 중요한 업무였습니다. 도서를 대여하고 반납받는 일도 꼭 필요한 일과 중 하나였습니다. 현재 이러한 일들은 대부분 자동화로 대체되었지만 이용자 맞춤 도서 추천이나 지역 문화프로그램 기획 등 창의적인 업무가 대신 필요해졌습니다.
대장장이와 도서관 사서는 시대에 따른 직업의 변천이라는 점에서는 공통되지만 세밀하게 들여다보면 차이점이 존재합니다. 방송기술은 어떤가요. 대장장이와 도서관 사서 중 어느 쪽에 더 가까울까요?
2000년대 초반 방송사에 입사했을 때 당시 카메라는 튜브(Tube) 카메라였습니다. Red, Green, Blue의 Tube 촬상관에 상이 정확히 일치하도록 레지스트레이션(Registration)이라는 작업이 촬영 전 꼭 필요했습니다. 레지스트레이션이 틀어지면 해상도가 저하되고 색 번짐이 발생했으니 영상 감독에게는 정말 스트레스받는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예전에는 스위처에서 선택한 영상 소스 하나만 PGM으로 녹화되었지만, 현재는 카메라 소스별로 녹화하는 ISO(Isolated Recording)가 일반화되었습니다. 장비의 성능 개선과 제작 흐름의 변화로 영상 감독은 레지스트레이션 대신 컬러 매칭이나 스트리밍을, 기술 감독은 스위칭보다는 제작 환경에 시간을 더 소요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방송 현장에서 가장 큰 변화는 무엇보다도 AI의 도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미 숏폼, STT(Speech-to-Text) 자막, 시스템 에러 검출 같은 분야는 AI가 도맡아 일을 처리하고 있습니다. 촬영된 영상의 분석을 통한 텍스트 기반 편집이나 무음 구간의 삭제 등 편집 작업에서 AI의 활용도 일상화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프롬프트에 의한 자동 편집도 사용되곤 합니다.
하지만 아직 AI가 대체하기에 어려운 부분도 존재합니다. 미묘한 음향의 뉘앙스를 인지한다거나 영상의 순간적인 변화를 반영해야 하는 일은 음향과 영상 감독의 손길이 필요합니다. 사전에 기획된 음악 비트에 맞춰 조명 무빙은 가능하겠지만 현장 관객 반응과 배우의 감정을 읽는 조명은 조명감독의 몫입니다. 제작 현장이 창의력으로 기획되고 순발력으로 대처되며 시청자의 기대와 만나는 순간 사람의 능력은 최대한 발휘됩니다. 전문적인 기술 지식과 세심한 미적 감각 그리고 통찰력 있는 인문학적 소양이 이를 가능하게 합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는 저서 ‘야생의 사고’에서 엔지니어(Engineer)와 브리콜레르(Bricoleur)를 비교했습니다. 레비스트로스의 엔지니어는 완벽한 계획과 도면을 준비합니다. 그렇지만 예측하지 못한 변화가 발생한다면 자체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무력화됩니다. 반면 브리콜레르는 새로운 도구를 만들지 않습니다. 변화가 발생해도 현재 자신에게 주어진 여건을 최대한 활용하여 당면한 문제를 창의적으로 해결합니다. 손재주꾼이라 불리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방송기술은 어떤가요. 엔지니어와 브리콜레르 중 어느 쪽에 더 가까울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