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기술저널=신현범 방송기술저널 편집주간/SBS 방송기술인협회 회장] AI가 방송 산업의 모든 화두를 집어삼키고 있다. 기획과 제작부터 송출 인프라에 이르기까지 AI는 더 빠르고 효율적인 답을 내놓으며 매혹적인 청사진을 제시한다. AI가 방송의 생산성과 효율성을 높일 수 있는 강력한 기술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그 변화의 방향을 부정할 이유도 없다.
그러나 이 거대한 혁신의 파도 앞에서 우리는 잠시 멈춰 본질적인 물음을 던져야 한다. 이제 문제는 AI를 도입할 것인가가 아니다. 우리가 더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것은 무엇을 AI에게 맡길 것인가, 그리고 무엇만큼은 인간이 판단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다.
AI가 모든 답을 빠르고 손쉽게 만들어내는 시대일수록 오히려 중요한 것은 답을 얻는 능력이 아닐지도 모른다. 무엇을 물을 것인지 고민하는 생각의 깊이, 즉 질문하는 능력이 더욱 중요해질 수 있다. 결국 AI혁신의 진정한 의미를 고민하는 지금, 우리는 다시 ‘질문’이라는 인간의 본질적인 능력을 돌아봐야 한다.
특히 방송은 더욱 그렇다. 방송이 오랜 시간 지켜온 신뢰와 공공성, 저널리즘의 무게와 창의적 책임은 단순히 AI의 연산 속도나 운영 효율성과 맞바꿀 수 있는 가치가 아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술에 대한 맹목적인 환호가 아니라 AI에게 무엇을 맡기고 무엇을 인간의 판단으로 남겨둘 것인지 치열하게 고민하는 과정이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방송 인프라의 IP 전환을 위해 오랜 시간 고단한 과정을 감내해 왔다. SMPTE ST 2110을 비롯한 국제 표준을 정립하고 엄격한 검증 체계를 세웠다. 오디오를 맞추기 위해 AES67을 논의했고 시간을 맞추기 위해 PTP 프로파일(ST 2059)을 정립했으며 장비 간 연결을 위해 NMOS IS-04와 IS-05를 마련했다. 그것으로도 충분하지 않아 JT-NM Tested와 같은 상호운용성 시험까지 거쳤다.
지루하고 소모적인 과정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지루함을 견뎠다. 그리고 그 대가로 특정 벤더에 종속되지 않을 자유와 누구나 확인하고 검증할 수 있는 품질을 얻었다.
방송기술인은 케이블 한 가닥에도 규격을 요구하는 사람들이다. 리턴로스가 몇 dB인지, 지터가 몇 UI인지 따지고 계측기로 측정한 수치가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납품을 거부한다. 방송이라는 시스템의 특성상 작은 불확실성 하나도 결국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AI 솔루션 앞에서는 어떤가. 현재 방송 현장에 쏟아지고 있는 AI 워크플로에는 과연 어떤 표준과 검증 체계가 존재하는가. 철저한 검증과 심사숙고 없이 추진되는 ‘표준 없는 혁신’의 청구서는 결국 특정 벤더에 대한 기술 종속으로 돌아올 가능성이 크다.
더 큰 문제는 그 비용이 당장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데 있다. 최신 트렌드에 맞춰 파편적으로 연동된 솔루션은 당장의 편리함과 효율성을 가져다 줄 수 있다. 하지만 충분한 검증과 아키텍처에 대한 고민 없이 쌓아 올린 시스템은 훗날 유지보수와 확장 단계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기술 부채’로 돌아올 수 있다. 혁신의 그림자 속에 조용히 쌓인 이 부채는 결국 방송의 뼈대를 이루는 인프라의 지속 가능성마저 흔드는 뇌관이 될 수 있다.
그래서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AI 도입과 사용에 명확한 평가 기준이 있는가. 오탐률과 미탐률의 허용 한계를 계약서에 명시하고 있는가. 모델이 조용히 업데이트되어 어제와 다른 결과를 내놓을 때 이를 감지할 절차가 있는가. 문제가 발생했을 때 어디까지 되돌릴 것인지 롤백 시나리오는 문서로 존재하는가. 판단의 근거가 되는 로그는 얼마나 보존되며 사고가 발생했을 때 그것을 확인할 권한은 누구에게 있는가. 무엇보다 우리의 아카이브가 학습 데이터로 흘러 들어갈 때 그 가치와 권리를 우리는 제대로 알고 있는가.
아직 많은 현장에서 이 질문들은 충분히 던져지지 않고 있다. 그저 도입의 속도 자체가 경쟁력인 것처럼 이야기되기도 한다. IP 전환에는 십수 년에 걸친 표준화와 검증을 요구하면서 AI에는 데모 한 번과 예산 편성만으로 문을 열어주고 있다면 이는 단순한 속도의 문제가 아니다. 기술을 대하는 우리의 기준이 흔들리고 있다는 뜻이다.
이제 방송기술인은 단순히 새로운 솔루션을 설치하고 유지하는 수동적 엔지니어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시스템 전체의 아키텍처를 바라보고 기술의 맹점을 검증하며 그 기술이 방송의 가치와 원칙에 부합하는지를 끊임없이 묻는 ‘주체적인 질문자’가 되어야 한다.
AI의 연산 능력은 인간을 압도할 것이다. 더 빠르게 분석하고 더 많은 데이터를 처리하며 더 그럴듯한 답을 만들어낼 것이다. 그러나 그 답이 방송의 가치에 부합하는지, 그 판단을 기계에 맡겨도 되는지, 그리고 문제가 발생했을 때 누가 책임질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여전히 인간의 몫이다.
AI가 가장 그럴듯한 답을 내놓는 시대일수록 우리는 더 날카롭고 본질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리고 그 질문을 멈추지 않는 것. 그것이 거대한 기술적 변곡점 앞에서 방송기술인이 지켜야 할 기준이자, 우리가 짊어져야 할 진정한 가치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