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기술저널=김제균 EBS 기술기획부 선임]
실행의 장벽이 사라진 시대, 말과 생각만으로 AI를 하고 있다는 착각을 버리자.
우리는 지금 AI를 너무 많이 ‘생각’하고, 너무 많이 ‘말’하고 있다. 방송사의 회의실마다 거창한 로드맵이 그려지고, “AI가 가져올 미래”에 대한 토론은 끝없이 이어지며, 수많은 보고서를 통해 계획되고 문서화되고 있다. 하지만 묻고 싶다. 정작 AI를 통해 콘텐츠를 만들어보고, 업무를 자동화해보거나 에이전트를 내 손으로 직접 빚어보고, 실패하고, 개선해본 ‘경험’은 얼마나 되는가?
과거에는 아이디어를 실제 프로토타입으로 구현하는 데 막대한 비용과 인력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AI 기술을 기반으로 개인이 혼자서 기획하고, 콘텐츠를 만들고, 바이브 코딩(Vibe Coding)으로 프로그램과 플러그인을 개발해 생산성을 높이는 전 과정이 가능해졌다. 기획을 행동으로 옮기는 데 드는 기회비용이 획기적으로 줄어든 것이다.
이처럼 실행의 문턱이 낮아진 환경에서, 여전히 책상에 앉아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하거나 듣고 본 것만으로 업무를 판단하고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신중함이 아니다. 그것은 어쩌면 AI 시대의 또 다른 산물인 ‘환각(Hallucination)’일지도 모른다. 지금은 백 마디의 말보다 한 번의 투박한 경험이 더 값진 시대다.
거대 SI의 시대는 갔다: ‘8할의 완성’에 집중하자.
우리가 직접 경험하며 빠르게 움직여야 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기존처럼 거대한 임무 하나를 완수하기 위해 1년 이상 개발하고, 외주를 주며 해결했던 ‘SI 방식’은 AI 시대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AI 기술은 한두 달 만에 판도가 바뀌고, 새로운 형태로 발전한다. 1년짜리 개발 계획을 세우는 순간, 그 계획은 이미 낡은 것이 된다.
핵심은 ‘되는 8할’과 ‘안 되는 2할’을 구분하는 지혜다. 8할이 작동한다면 나머지 2할을 구현하기 위해 막대한 자원을 쏟아부을 필요가 없다. 한 달 뒤에 출시될 새로운 LLM이나 AI SaaS가 그 난해했던 2할의 기능을 기본 옵션으로 제공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겁고 느린 외주 대신, 빠르고 가벼운 직접 경험을 선택해야 한다.
AI는 ‘완성형 공정’이 아니라 ‘가변형 노드’다.
이러한 민첩한 대응이 가능한 이유는 AI의 기술적 특성 덕분이다. 많은 이들이 AI를 도입하거나 구독하면 끝나는 완성된 제품으로 오해한다. 하지만 AI는 완성형 블록이 아니라, 각각의 기능과 목적을 모듈화하고 함수화된 ‘노드(Node) 구조’를 통해 해결할 수 있는 가변형 기술이다.
오늘 ChatGPT를 쓴다고 해서 우리가 영원히 그 플랫폼에 종속(Lock-in)되어야 할까? 아니다. AI를 직접 다뤄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특정 모델에 갇히지 않는다. 이전처럼 해외 글로벌 벤더의 솔루션을 수동적으로 마이그레이션 해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목적과 프로젝트 성격에 맞춰 LLM을 자유롭게 교체하고, 필요한 기능들을 모듈처럼 연결해 회사와 부서, 개인의 업무에 최적화된 공정을 설계해 낼 수 있다.
이제 방송기술인은 단순히 주어진 도구를 사용하는 사용자를 넘어, 나만의 에이전트를 설계하고 업무에 반영하는 ‘디지털 장인’의 능력이 필요하다.
경험은 ‘종착지’가 아니라 다음 단계로 가는 ‘나침반’이다.
하지만 여기서 반드시 경계해야 할 점이 있다. 지금 내가 만든 것이 AI의 전부라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AI 기술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비약적인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 오늘 내가 성공적으로 구축한 시스템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최종 완성품’으로 여기고 현상 유지를 목표로 삼는 순간 우리는 또다시 도태된다.
직접 만들어보는 경험이 중요한 이유는 결과물 그 자체에 있지 않다. 그 과정을 통해 얻는 ‘인사이트’와 ‘비전’에 있다. AI의 작동 원리를 체득하고 기술의 발전 흐름을 읽어내는 것을 넘어, 프로젝트 전체를 분석하고 설계할 수 있는 ‘거시적 안목’을 갖게 되는 것이 핵심이다. 우리는 현재의 결과물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 얻은 확장된 시야로 더 높은 목표를 세우고 끊임없이 방향을 수정(Pivot)해 나아가야 한다.
AI는 ‘토론’이 아니라 ‘경험’으로 완성된다.
결국 모든 것은 ‘경험’으로 귀결된다. 급변하는 기술 속도에 맞춰 8할의 성공을 빠르게 취하는 것도, 모듈식 구조를 이용해 유연하게 대처하는 것도, 현재의 성취에 안주하지 않고 다음 비전을 보는 것도 책상 위 토론이나 탁상공론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2026년, 가트너(Gartner)에서 말하는 멀티 에이전트의 시대는 회의실에서 전략을 ‘말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오늘 당장 서툴더라도 무언가를 조립해 보고 경험한 사람들이 누리는 미래다.
우리는 질문을 바꿔야 한다. “AI가 우리를 어떻게 바꿀까?”가 아니라, “오늘 나는 AI로 무엇을 경험했는가?”를 물어야 한다. 우리는 ‘말하는 집단’에서 ‘경험하는 집단’으로 진화해야 한다. 이제부터라도 다양한 곳에서 다양한 프로젝트를 직접 경험하고 그 결과를 공유하자. 그 작은 경험이 거대한 변화의 시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