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기술저널=박종원 전 KBS춘천방송총국장]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방송통신위원장의 일방적 교체와 2인 체제 방통위에서 공영방송을 장악하려는 많은 시도가 있었다. 수신료 재원을 통제하고 낙하산 사장의 임명을 통해 공영방송 인사와 프로그램의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공영방송이 정권의 홍보 도구화로 활용되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KBS, MBC 등 공영방송의 사장과 이사회는 사실상 대선에서 승리한 여당의 전유물이 되었고, 이로 인해 공영방송은 정치에 완전히 종속되었다. 탄핵으로 정권이 조기에 교체되면서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에 대한 논의가 탄력을 받고 있다. 윤석열 정부의 공영방송 장악 시도에 맞서 이훈기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발의한 공영방송 지배구조를 개선하는 ‘방송3법’은 윤석열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로 결국 무산되었다. 이제 관심은 집권 여당에 유리한 현재의 정치 종속적인 공영방송 지배구조를 개선할 것인가에 쏠린다. 또한, 어떠한 방식으로 이사회 구조를 개편하고 누구에게 공영방송을 감독할 국민 대표성을 부여할 것인지 중요한 쟁점으로 부상하고 있다.
기존 공영방송 지배구조는 방통위가 추천하는 형식을 띠고 있지만, 사실상 KBS의 경우 7대4, MBC 대주주인 방송문화진흥회는 6대3의 구조로 정치권, 특히 집권당의 전리품과 다름없었다.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 논의는 오래된 개혁 과제임에도 불구하고,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치적 유불리에 따라 지배구조 개선 논의가 실종되는 경험을 반복해 왔다. 이는 정권을 잡은 정당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현재의 공영방송 지배구조를 개선하지 않고, 일부 이사회 교체를 통해 사장을 바꾸는 방식으로 공영방송에 대한 장악력을 강화해 왔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 초기, 공영방송 지배구조를 개선할 절호의 기회가 있었음에도 어떠한 개혁 조치도 하지 않았고, 결국 우리는 윤석열 정부의 노골적인 방송 장악을 목격한 바 있다. 이제 정권이 교체된 지금이야말로 공영방송의 독립성을 강화하는 지배구조 개선을 이루어 내야 하는 절박한 시점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공영방송의 독립성을 꾸준히 주장해 온 노조와 시민단체, 학계는 현 시점을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의 적기로 보고 있다. 하지만 민주당이 정권을 잡게 되면서 공영방송 지배구조 논의에 대한 기대와 우려가 동시에 교차하고 있다.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어려운 주된 이유는 정부 여당과 정치권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쉽게 포기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또한, 공영방송 지배구조에 대한 학술적, 이론적 논의가 충분히 축적되지 못했고, 해외의 사례는 참고는 할 수 있지만 해당 국가의 정치 사회 문화적 역사적 배경이 다르다는 한계가 있다. 이러한 배경으로 공영방송 지배구조를 어떻게 개선해야 하는지에 대한 다양한 논의와 쟁점이 존재한다. 공영방송 이사회의 규모를 몇 명으로 할지, 어떻게 구성해야 할지, 그리고 공영방송 이사회가 어떠한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지에 대해 각각의 이해당사자마다 주장과 내용이 상이하다는 점도 정치·사회적 합의를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다.
공영방송 지배구조는 해당 국가의 정치구조와 밀접한 병행성을 가진다. 예를 들어, 대통령제 국가에서는 정부 여당의 기득권을 인정하는 경향이 있고, 의회제 국가에서는 의석 비율에 따라 지배구조를 구성하기도 한다. 반면, 협치가 발달한 독일과 북유럽 국가는 공영방송 지배구조에 다양한 이해 세력들이 참여하는 형태를 띠고 있다. 우리나라는 대통령제 국가로서 규제기관인 방통위의 추천 형식을 띠고 있지만, 사실상 정부 여당의 기득권을 인정하여 대통령이 직접 임명하는 형태인 ‘정부형 지배구조’가 제도화되었다.
최근 논의되는 공영방송 지배구조 법안은 이사회 인원을 증원하고 정치적 후견주의를 완화하려는 시도로, 독일식 방송평의회 방식을 일부 참고한 것이다. 독일의 경우, 2014년 연방 헌법재판소 판결에 따라 정치권 추천을 3분의 1 이하로 낮춘 바 있다. 특히 독일은 연방헌법재판소가 주 정부가 방송을 통제하려 할 때, 공영방송의 독립성을 보호하는 중요한 결정을 여러 차례 내려왔다. 이는 독일 연방헌법재판소가 공영방송에 대한 국가권력의 개입을 최소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내린 결정들이다. 현재 언론노조 및 시민사회는 이사회 구성에서 정치권(국회)의 몫을 30% 이하로 제한하는 것을 적정선으로 제시하고 있다.
윤석열 정권이 탄핵으로 교체되면서 윤석열 정부에서 거부되었던 ‘방송3법’이 민주당에 의해 재발의될 예정이다. 정권 교체와 함께 12일 본회의에서 처리될 예정이었던 방송3법은 표면적으로는 여당의 원내대표 선출과 맞물리면서 다소 연기된 상황이다. 최근 알려진 법안의 내용에 따르면, KBS의 경우 이사 수를 기존 11명에서 15명으로, MBC 대주주인 방문진과 EBS는 기존 9명에서 13명으로 늘리는 것을 골자로 한다. 이사 추천 방식은 국회에서 KBS 7명, 방문진과 EBS는 6명을 추천하고, 나머지 이사는 학계(2명), 법조계(2명), 시청자위원회(명), 임직원(2명) 등이 추천하자는 방안을 담고 있다. 최근 발의된 공영방송 지배구조 법안의 핵심은 이사회 인원을 증원하고, 국회 추천 몫을 50% 미만으로 제한하며, 이사회 추천 직역을 구체화하는 것으로 요약된다. 또한 공영방송 사장 선임 방식은 성별, 연령, 지역 등을 고려한 100명의 사장후보국민추천위원회가 복수로 추천하고, 재적이사 3분의 2 이상의 찬성으로 선임하는 특별다수제를 도입하는 것이다. 이는 기존 정부 여당이 주도해서 이사회를 구성하여 대통령이 공영방송 사장을 낙점하고 선정하는 밀실의 선임 과정을 탈피하여, 공개된 영역에서 사장추천위원회를 통해 대통령이 은밀하게 지명하는 낙하산 사장을 막을 수 있다는 점에서 진일보한 법안이라 평가된다. 90여 개 언론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언론장악저지공동행동은 12일 성명을 내어 언론개혁의 핵심이자 이재명 정부의 공약이기도 한 방송3법 개정 추진이 어떤 과제보다도 차질 없이 빠르게 추진되어야 한다고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다.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에 대한 다양한 의견과 주장들이 쏟아지고 있는 가운데, 공영방송 지배구조를 개선하기 위한 당위성과 방향성에 대해 제언하고자 한다. 첫째, 공영방송 지배구조의 대전제는 공영방송의 독립성을 최대한 보장하는 방식이어야 한다. 정치의 과도한 개입으로 훼손된 공영방송을 복원하는 핵심은 바로 정치의 개입을 최소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기존의 정치적 후견주의를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지배구조가 개선되어야 한다. 공영방송은 특정 정권의 전리품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원칙과 공론장을 구성하는 원칙에 따라 정치 개입을 최소화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현재 논의되고 있는 법안은 정치 후견주의를 완전히 배제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존의 이훈기 의원이 발의하고 통과되었던 법안보다 다소 후퇴한 측면이 있다. 정치도 공영방송 이사회에 일부로 참여할 수 있는 주체로 볼 수 있으므로, 정치권 전체를 이사회 구성에 배제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따라서 시민단체와 학계, 언론노조, 현업단체가 주장하는 1/3 정도의 정치권 참여가 적정한 수준이라 판단된다.
둘째, 공영방송의 지배구조 참여에 있어서는 다양성 확보가 필수적이다. 공영방송은 사회의 다양한 목소리를 담아낼 수 있어야 하기에, 이사회 구성에 지역 대표성, 여성, 노동계를 포함하는 사회적 약자를 대변할 수 있는 인사들이 포함되어야 한다. 현재 발의된 법안에서 학계(2
명), 법조계(2명), 시청자위원회(명), 임직원(2명) 등의 추천 몫을 통해 이러한 대표성을 보강하는 것도 하나의 방안이 될 수 있다. 우리 사회가 다원화되면서 공영방송을 둘러싼 이해 갈등은 정치의 영역을 넘어 시장· 세대· 지역· 직능· 종교· 젠더 등 다원한 측면을 포함하는 참여 구조를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
셋째, 공영방송 이사회는 협치 정신으로 운영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민주주의에 대한 깊은 이해와 공영방송에 대한 전문성을 바탕으로 이사 선임의 자격 요건을 강화해야 한다. 이사회는 특정 정파의 이념과 이익을 대변하는 정치 투쟁의 장이 아닌, 민주주의와 국민의 공론장을 대변하면서 협치의 장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기대하는 공영방송 이사회는 정파의 유불리에 따른 정쟁의 장이 아니라, 민주주의와 국민의 공론장을 대변할 수 있는 품격과 전문성을 갖춘 기구여야 한다. 특정 정당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전문성을 바탕으로 공영방송의 독립성을 수호하며 국민을 대표하는 감독기관으로서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다. 1987년부터 오랫동안 굳어진 제도가 단 한 번의 방송법 개정으로 완전히 변화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치가 공영방송 지배구조를 전부 주도해 온 현재의 제도에서 이번 ‘방송3법’ 개정은 분명 진일보한 측면은 있다. 한편, 공영방송 지배구조는 민주주의의 근간인 공론장의 원칙을 확립하는 중요한 과제이기에, 가능한 여당과 야당의 합의가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 윤석열 정부의 방송 장악 시도에 대한 사과와 함께 오직 정치에 종속된 공영방송의 지배구조만을 옹호해 온 국민의힘의 전향적인 변화가 전제되어야 한다. 우리는 정권 교체 시마다 정부 여당에 의해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이 방치되었던 사례를 보아왔다. 따라서 이번에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을 조기에 매듭짓는 것은 이재명 정부의 ‘방송 장악’이라는 오해를 불식시킬 수 있다. 이러한 대전제 아래, 법안의 완성도를 제고할 수 있는 세부적인 내용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나아가 공영방송의 독립성이 외부의 이사회 구성으로 완성되지 않기 때문에 공영방송 스스로 독립성을 수호할 수 있는 정신과 문화를 길러야 한다. 대통령이 공영방송을 장악할 수 없도록 정치적 후견주의를 차단하는 것을 제도화만큼이나, 공영방송 스스로 정치적 후견주의를 배척하는 문화와 전통, 공영방송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