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기술저널=SBS 뉴미디어개발팀 부국장 오건식] 보통 대한민국 TV 방송의 역사를 논할 때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것이 있다. 바로 1980년의 ‘컬러TV 방송 시작’이다. 비록 시작은 신군부에 의한 여론 환기용 정책이라는 평가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일상생활을 확 바꿔 놓은 것은 사실이다. 사람은 사물을 컬러로 인식하지만 개는 흑백으로 인식한다고 한다. 그러니까 방송으로만 따지면 1980년도 이전에 시청자는 개와 유사했지만 그 이후에는 사람이 된 것이다. 컬러TV 방송을 시작한 지 40년이 다 돼 가는 작년에 ‘국민은 개·돼지’ 논란이 벌어진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컬러TV 방송 이후에 방식 선정문제로 시끄러웠던 DTV 본방송 실시 및 아날로그 TV 종료가 있었다. 되돌아보면 역대 TV 방송 방식 결정만큼은 한미 공조가 확실했다. ATV에서는 당연하게 NTSC 방식이 선정됐고, DTV 표준 방식 선정에서 거의 모든 방송기술인의 열망인 유럽의 DVB 방식을 제치고 미국의 ATSC 방식 도입이 결정됐다. UHD TV 방식 선정에 있어서도 초기에는 DVB-T2가 압도적으로 앞서 나갔다. ‘빨리빨리’를 제1의 덕목으로 생각하는 Dynamic Korea에서 보기에 그 당시에 바로 적용 가능한 UHD TV 방식은 유럽 방식밖에 없었으니까. 아직도 DVB 홈페이지의 초기 화면을 보면 대한민국은 UHD TV 방식을 T2로 결정한 나라처럼 보인다. 우리나라를 포함해 전 세계 166개국에서 유럽 방식의 DVB(DBV-T, DVB-T2)로 DTV 방송을 하고 있거나 할 예정이라고 나와 있다. 우리가 ATSC 3.0으로 결정했으며 오는 5월 31일 그 역사적인 본방송을 세계 최초로 시작한다는 사실을 아직 모르고 있나 보다. 옛 애인이 지금도 애인이라는 착각을 하고 있던지, 아니면 알면서도 그 사실을 인정하기 싫었던지. 대한민국은 이미 마음이 떠났다고 누군가가 꼭 알려주시기 바란다.
방송기술 엔지니어로 살면서 DTV 본방송과 UHD TV 본방송 개시를 모두 경험해보는 일은 흔한 일은 아닐 것이다. UHD TV 본방송이 시작되는 5월 31일은 DTV 본방송이 시작된 2001년 10월 26일에서 5,697일째 되는 날로, 방송기술 엔지니어로 최소 16년 이상을 근무해야 경험할 수 있다. 2001년의 DTV 본방송 실시는 세계적으로 10위권 밖이다. DTV 방식 논쟁과는 별개로 이미 다른 나라에서 해 본 것을 도입한 것이라 비교적 시행착오가 적었다. 그런데 UHD TV 본방송은 우리나라가 세계 최초이므로 표준 제정, 방송 장비 개발, 송중계망 구축 및 필드 시험을 다 통과해야 비로소 가능하다. 실제로 대한민국은 DVB-T2에서 변심을 결심하면서 ATSC 3.0 표준 제정 단계부터 큰 역할을 해왔다. 대부분의 표준 내용에는 직간접적으로 우리나라의 의중이 반영돼 있다. 그래서인지 지난 3월에 열린 ‘Global UHD TV Forum’은 UHD TV 분야에서 대한민국의 위치를 확인하는 자리였다. 이제는 우리가 ‘~~을 해봤더니’라고 말할 수 있는 위상을 갖게 된 것이다. 어떻게 보면 거의 독학을 통해 원조가 된 것이다. 참고서 없이 표준이라는 교과서만 공부해서 이룬 성과다. 그런 면에서 실험 방송부터 참여한 방송기술 엔지니어들은 이제는 좀 자뻑을 해도 될 듯하다. 이들의 노고에 힘입어 대한민국이 비로소 전 세계 방송기술의 변방에서 어벤저스 일원이 된 것이다. 수없이 많은 DTV PG 회의 및 분과 회의, 방송 장비 업체와의 미팅, 실험 방송 전파 측정 등 노력의 결과물로 이룬 업적이다. 파트너가 되어준 방송 장비 업체들과 가전사들의 도움도 여기에 큰 역할을 했다. 다만, 본디 9월 본방송 실시를 원했으나 조금 앞당겨진 일정으로 일부 부문에서 아직 충분한 Field Test를 거치지 않은 점과 ATSC 3.0 튜너를 내장한 수신기의 보급이 늦은 점 등이 마음에 걸린다. 하지만 2달 만에 대통령도 뽑는 Dynamic Korea에서는 뭐 대단한 일도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초기에 약간의 실수가 있더라도 시청자들이 너그럽게 이해해 주실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아무도 2등은 기억하지 않는다’는 모 그룹의 광고 카피가 있었다. 우리는 ATV 100위권, DTV 10위권 밖이었지만 UHD TV에서는 ‘누구나 기억하는 1등’을 달성한 것이다. 어마무시한 격세지감의 일을 우리 손으로 해낸 것이다.
개인적으로도 아날로그 TV 시절에 입사해서 DTV 본방송, UHD TV 본방송 개시의 현장에 있게 된 것을 큰 영광으로 생각한다. 앞서 이야기한 컬러TV 방송 개시 현장에도 있었다면 3관왕이 됐을 텐데, 그러기에는 연식이 조금 모자란다. 어쩌면 ‘ATV, DTV, UHD TV 모두 경험한 자 잠들다’는 필자의 묘비명이 될 것이다. 그러니 5월 31일 같이 경축해야 하는 날은 방송사 자체적으로 유급 휴일로 정해야 하는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