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름에 대한 변명

필름에 대한 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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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BBS 기술팀 권영걸

“취미가 있으세요?”

“네, 사진 찍는게 제 취미입니다.”

이런 대답을 한지는 5년이 조금 넘는다. 그러나, 한 2년 전 부터는 사진이 취미라는 말에 슬슬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내 경우에 사진을 취미라고 하기에는 너무 고달프다. 원인은 필름이다. 디지털카메라를 사용할 때는 이정도로 고달프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데 필름으로 사진을 하면서부터는 전문적으로 하는 것도 아닌 것이 참 번거롭고 노동 강도도 고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필름을 사용하는 이유를 변명코자 한다.

 

주5일근무제를 계기로 직장인들의 여가시간이 늘면서 사회적으로 취미활동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었다. 여가시간이 늘어난 것 외에도 인터넷동호회의 활성화가 이에 기여한 바가 크다. 관심분야에 대한 정보공유가 쉬워지고, 비슷한 생각을 공유하는 사람들 간의 커뮤니티가 자연스레 형성되면서, 예전에는 생소했던 취미분야의 문턱을 크게 낮추고 더불어 매니아급 혹은 준 전문가급 취미가들도 급격히 늘고 있다. 이들의 활발한 활동은 입문자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취미활동 자체의 저변을 다시금 급격히 확대재생산해는 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취미활동의 저변확대가 연관 산업을 활성화시키는 촉매로 작용해서 각종 취미용품 시장의 안정적 형성을 가능케 했다. 취미용품시장의 산업화는 대량생산을 통한 가격하락을 통해 취미활동의 문턱을 더욱 낮추기에 이른다.

 

디지털카메라는 고속 인터넷이 보편화된 요즘에 손쉽게 자기표현을 할 수 있는 수단이다. 반면 컴퓨터 후보정이 보편화되면서 디지털카메라의 색감이나 리터치에 정서적으로 싫증을 느낀 사람들이 많이 생겨났다. 사진을 좋아하면서도 이러한 사진 분위기를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들이 선택한 대안은 다시 옛날로 돌아가서 필름을 선택한 것이다. 디지털카메라의 보편화로 필름관련 산업이 사양화하면서 필름의 사용이 옛날에 비해 상당히 불편해졌지만 필름을 애용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그것을 희소성으로 생각할지도 모를 일이다.

 

필름 사용의 매력중 하나는 담백함이다. 자로 잰듯 한 구도와 색감 이런 것 따지지 않고 그냥 있는 풍경 그대로 바라보는 듯한 밋밋함이 오히려 매력이다. 거기에 무언가 거친 듯한 질감이 함께하기도 하고 살짝 먼지나 스크래치도 심하지 않다면 보아줄만 하다. 로모카메라나 홀가의 경우는 광학적 비네팅이 분위기를 더해주기까지 한다. 이런 담백함이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필름의 매력이지 싶다.

 

필름의 또다른 매력은 판형이 자유롭다는 것이다. 35mm, 6X45cm, 6X6cm, 6X7cm, 6X9cm, 6X12cm, 6X17cm, 4X5in, 5X7in, 8X10in 등 작은 사이즈부터 매우 큰 사이즈의 필름별로 카메라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135포맷이라고 부르는 35mm카메라의 규격을 벗어나지 못하는 DSLR과 비교할 때 큰 덩치에 가득 차는 뷰파인더를 보는 것만으로도 시원하며, 결과를 떠나 새로운 재미를 선사한다. 또한 대형필름으로 촬영한 사진은 앞서 이야기한 담백함과는 다른 새로운 느낌의 매력을 전해준다. 대형포맷의 필름은 디지털에서는 흉내낼 수 없는 높은 퀄리티의 선예도와 계조의 섬세함을 보여준다.

 

판형이 큰 필름카메라는 대체로 삼각대에 받치고 한컷 찍고 구도 잡고 노출잡고 한컷 찍고 하는 식으로 느림보 카메라다. 많이 찍을 수도 없다. 4X5in이상되는 카메라는 연속촬영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필름자체를 한 컷씩 장전하기 때문이다. 참 불편하기 짝이 없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한컷 한컷 느긋하게 신중하게 찍을 수 있다. 급하게 찰칵찰칵 찍던 사람이 이 느긋함을 한번 느껴보면, 의외로 평소에 보지 못하던 풍경이 보인다. 이 큰 카메라는 렌즈가 많지도 않다. 그저 단렌즈 하나로 찍을 것 다 찍어야할 운명이다. 그래서인지 대형카메라로 촬영할라 치면 이리재고 저리재고 1시간 꼬빡 작업해서 1장 찍는다. 그마저도 맘에 안들면 그 한 장도 안 찍고 만다.

 

나는 필름현상과 인화를 직접한다. 물론 이런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작업공간부터해서 제약이 많아서 하고 싶어도 못하는 분들도 많지만, 필름작업의 백미중의 백미가 현상, 인화가 아닌가 한다. 컴퓨터로 스캔받은 사진과 전통방식으로 암실에서 인화한 것을 비교해보면 분명한 차이가 느껴진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필름사진의 느낌은 스캐너로 읽어들인 것들이 대부분이다. 사실 이는 필름의 본래 느낌 그대로라고 말하기 어렵다. 필름은 원래 암실에서 프린트할 것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졌지만 디지털시대에 디지털정보로 변환하는 과정에서 원래의 모습이 조금 다르게 알려지는 건 아닐까 한다.

 

이 외에도 필름을 사용하면서 행복한 점들을 말하라면 더 있을것 같지만 구체적으로 말하기가 어렵다. 결론은 위에서 말한 필름의 장점은 대부분 감성적인 부분이란 것이다. 기술적 비교우위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너무 쉽게 제작되고 완벽한 듯한 모습에 질식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일지는 모르지만 필름의 어눌하고 투박한 모습에, 혹은 그 고달픈 여러 후속작업 속에 최종 한 장으로 나오는 결과에 뿌듯해 하는지도 모르겠다. 돌이켜보면 필름 사용의 최종목적은 결과를 위해서가 아닐지도 모른단 생각이 문득 든다. 필름장전부터 구도, 측광, 촬영, 현상, 스캔, 인화 등 이런 과정자체를 내가 즐기고 있기 때문에 행복한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