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기술저널=오건식 SBS 뉴미디어개발팀 부국장] 가끔 ‘사장님 뜻이니 조속히 처리해서 방송될 수 있도록 하라’는 지시를 하는 상사가 계셨다. 초년병 시절이라 감히 사장님에게 달려가서, ‘정말로 이런 지시를 하셨어요?’ 하고 물어볼 수 없었기에 그 진위는 알 수 없었다. 그 후에도 여러 번 이러한 상황을 겪고 나니 사장님이 참 디테일 하시다고 생각하게 됐다.
합리적으로 엔지니어를 설득할 수 없을 것 같은 경우에는 방송기술 Staff를 Bypass해서 CEO나 임원에게 직보해 엔지니어가 울며 겨자 먹기로 시스템 구성을 변경하거나 부랴부랴 부가 콘텐츠를 개발해 방송해야 하는 일들이 있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엔지니어들의 곤조’가 아주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하지만 필요성과 당위성을 합리적으로 설명한 경우에 부탁을 안 들어준 경우는 레알 없었다. 이렇게 설득을 할 수 있는 능력도 당근 실력이다. 돈 많은 부모를 만나는 것 이상으로. 그래서인지 기사나 콘텐츠를 잘 만드는 것과는 별개로 타 부문의 직원들 설득에도 공을 들이는 PD나 기자들이 잘 풀리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당근 실험적인 방송 시도도 많이 할 수 있었고.
요사이 국정농단 사태의 본질은 상명하복과 이를 빙자해서 중간에서 농간을 부리는 행태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아무 생각이나 비판 의식 없이 VVIP나 비선실세가 원한다고만 하면 만사형통이 되는 관행이 사태를 키우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고식지계(姑息之計)는 중국 예기(禮記)에 나오는 말로 증자(曾子)가 ‘군자가 사람을 대할 때는 덕(德)으로 하지만 소인은 고식(姑息)으로 한다’는 구절에서 연유된 것이다. 고식이란 철모르는 사람을 뜻하는 것으로, 고식지계는 원칙이 없는 임시변통의 계책을 의미한다. 관리자나 중간 관리자가 편하기 위해 고식지계를 쓰면 원하는 결과물을 빨리 얻을 수 있겠지만, 누적이 되면 부메랑이 돼 본인에게 큰 위험이 된다. ‘사장님 뜻’을 수차례나 빙자하신 그분은 어느 순간 조용히 팽 당하셨다. 이번 게이트 국면에서 VVIP나 비선실세를 빙자해서 권세를 떨쳐온 이들은 거의 모두 은팔찌를 했거나 할 예정이다. 말 그대로 진짜 부덕의 소치이다. 덕불고(德不孤)는 고등학교 이름이 아니다.
상대방을 설득할 실력이 없으면 상대방의 의견에 따라야 하는 것이 소통이다. 그렇게 하기 싫으면 중이 절을 떠나야 한다. 모여서 앉은 순서대로 한마디씩 하는 것이 소통이라고 생각했다면 정말 웃기는 소통(笑通)이다. 방송이 통신에 밀리게 된 근본 원인이 단방향성에 있음은 누구나 주지하는 바다. 그들이 사용한 대포폰은 통신 단말이 아니고 확성기 같은 단방향성 기기다. 그들은 정말로 그 흔한 Brain-Storming이란 것을 한 번도 안 해본 것일까? 아니면 Brain이 이미 Storming된 것일까?
이러한 소통 부재의 사회에서는 이상한(?) 감동이 자주 생긴다. 지하철 구의역의 고장 난 안전문을 혼자 고치다 사고를 당한 19세 김 군의 소지품에서 나온 컵라면에 울컥하고, 세월호 참사 당시 무리한 잠수와 스트레스의 원인으로 유명을 달리한 고 김관홍 잠수사의 스토리에 안타까워했다. 암 투병 중인 M본부의 해직 기자인 이용마 노조 전 홍보국장의 ‘바로 서는 언론을 보는 것이 최고의 항암제’라는 발언에도 울컥했다. 하지만 이렇게 울컥하는 상황들은 근본적으로 발생하면 안 되는 것들이다. 상식적으로 시스템에 의해서 걸러져서 일어나서는 안 될 일들이 사고의 형태로 나타나고, 그들의 미담이나 희생이 화제가 되고 있다. 감동 먹어 울컥하고 흥분하면 이성적으로 처리돼야 할 근본적인 일들이 묻히고 만다. 사고에 책임이 있는 당사자들은 책임 회피를 위해 그런 식으로 프레임을 만들어 가기도 한다. 미담이나 희생에 울컥하기보다는 아직도 시스템이 개선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분노해야 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분개만 하지 않고 계속해서 문제를 제기한 ‘#그런데_최순실은?’ Hash Tag는 촛불 혁명에 큰 역할을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제는 블랙리스트도 모자라서 적군리스트까지 나왔다고 한다. 적군(敵軍)리스트는 말 그대로 ‘우리 편이 아님’을 넘어서 섬멸해야 할 대상자들 명단이다. 한자 표기는 다르지만 일본이나 독일의 극좌파 무장단체인 적군파(赤軍派)를 떠올리는 섬뜩한 단어이다. ‘서로 다름’에 대해 통합은 물 건너간 지 오래고 섬멸해야 할 대상으로 증오심만 남은 극단적 고식지계의 결과물이 적군리스트다. 교육계에는 블루리스트까지 나왔다고 하니, 볼펜 중에 검은색·파란색·빨간색이 가장 많이 팔리는 이유를 이제서야 알 것 같다.
버뜨 혁신은 이러한 블랙리스트나 적군리스트에 있는 사람들이 주도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사고나 방식이 이전과 같다면 혁신이란 존재할 수가 없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고, 나는 놈 위에 튀는 놈 있다.
새해엔 제발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유 등으로 울컥하는 일들이 안 생기기를 바란다. 본 칼럼이 넘 감동적이라도 울컥하지 마시기를. 전혀 감동적이지 않았다면, ‘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