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리스트 유감

[칼럼] 블랙리스트 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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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기술저널=SBS 뉴미디어개발팀 부국장 오건식] 2009년에 나온 김려령 작가가 쓴 『우아한 거짓말』이라는 소설이 있다. 이 소설은 2013년에 영화화되기도 했다. 소설 속 왕따를 당한 주인공 천지는 왕따를 고발하고 복수를 하기 위해 죽음이란 방법을 택한다. 그 과정에서 키워드가 될 만한 것 5개를 털실 뭉치에 남겨놓았다는 내용이다. 세상에 왕따를 주제로 한 소설이나 영화는 아주 많이 있다. 왕따를 시키는 이들에게는 개울에다 돌 하나 던지기겠지만, 왕따를 당하는 개구리들에게는 매우 심각한 수준이기에 많이 다뤄진 것일 것이다. 얼마 전 모 사립초등학교에서는 돈 있고 힘 있는 집안 아이들이 급우에게 폭력을 휘둘러서 문제가 됐다. 왕따와 폭력도 문제였지만 폭력을 행사한 아이들 부모가 소위 ‘갑질’을 해서 더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예술인 블랙리스트는 지난 정부 차원에서 자행된 왕따 리스트다. 며칠 전 블랙리스트 작성을 주도한 혐의로 대통령 비서실장과 문화부 장관에 대한 구형이 있었다. 이달 말경 선고가 내려진다고 한다. 청문회 때는 해당 업무의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이야기하더니, 막상 문제가 되니까 아무것도 모른다고 한다. 재판 과정에서는 사실 여부를 떠나서 과거의 주군(?)을 보호하기 위해 ‘이 모든 것이 내 탓이요’하는 의리는 전혀 없다. 하긴 인간에 대한 의리가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정권 차원에서 ‘저 사람들과는 놀지 말라’고 지침을 내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인류 역사의 변곡점은 대부분 차별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 평소에 공짜로 줘도 안 먹는 건빵이라도 나만 못 받은 것을 아는 순간 열을 받는데, 생계에 직결된 문제라면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모 방송사는 출연을 제한시키는 블랙리스트가 있다는 의심을 많이 받아왔다. 업무 자체의 목표가 공명정대인 사법부에서도 블랙리스트의 존재 여부에 대해 논란이 있는 것을 보면 우리 사회에 블랙리스트가 광범위하게 존재하는 것 같다. 여성 가수 그룹 이름으로 블랙리스트가 있었고, 미드 시리즈 제목으로 블랙리스트도 있다. 그룹 이름을 블랙리스트로 지으면서 방송 출연을 원했는지는 정말 모를 일이다.

공공 부문에서 블랙리스트를 작성해 차별을 했던 것을 보면 회사 차원에서는 밉보인 사람들이 당연히 부지기수로 많을 것이다. 물론 방송기술계도 예외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D대학 교수로 재직 중인 P교수는 방송사 근무 시절에 4K UHD의 초고화질을 위해서는 1채널 6MHz에 수용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다가 윗분들 눈 밖에 났다. 방송 주파수를 조기에 확보해야 하는 경영진의 입장에서는 수용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4K UHD 본방송을 실시하고 있지만 거금을 들여서 UHD TV를 장만한 시청자가 HD와 화질의 차이성이 별로 없다고 주장하면 대응이 군색해질 수밖에 없다. ‘당신은 UHD 부적격자’라거나 ‘이게요, HEVC라고 효율이 따블인 인코더라서 화질이 겁나 좋아요’라고 한들 이해시키기 어려울 것이다.

특히 새로운 방송 방식이 도입될 때마다,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열외를 시키는 왕따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긴 호흡으로 볼 때 그들의 생각이 맞는 경우가 많았다. 갈수록 치열해지는 개인형·맞춤형 시대에 개개인의 경험과 비전은 그 자체로 가치가 크다. 전 세계에 70억 명이 있다면, 70억 개 이상의 콘텐츠 소비 패턴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이미 방송사 수익의 상당 부분이 광고 이외의 콘텐츠 유통이나 부가 서비스에서 발생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렇게 다양한 생각을 막아서는 안 될 것이다. 이는 문화계의 블랙리스트가 문화의 다양성을 저해하고, 궁극적으로 대중으로 하여금 문화 상품에 대해 지갑을 닫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다양성에 대해 비판적인 체제는 빠른 속도로 파멸의 길에 들어섰다.

이제 새 정부가 출범한 지 두 달이 지났다. 지난 정부 시절에 나름(?) 블랙리스트에 오르려고 노력했으나 필자의 박쥐같은 습성으로 블랙리스트에 오르는 데는 실패했다. 블랙은커녕 그레이 리스트에 오르지도 못했다. 역시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은 힘든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정부 블랙리스트에 올라서 고생한 여러 예술인에게 다시 한번 더 경의를 표하며 앞으로는 블랙리스트 없는 사회를 꿈꾼다. 하지만 마음속의 개인적인 블랙리스트는 지우기 힘들 것 같다. ‘J야, 지금이라도 돈 갚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