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가 사라진다면

[추천도서] 한국어가 사라진다면

1141
   
▲ 한겨레출판

이 책을 발견한 것은 철지난 사회과학서적을 떨이로 파는 온라인 서점의 행사에서였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20세기 마지막을 뜨겁게 달궜던 ‘영어를 공용어로 제정하자는 소설가 복거일 씨의 주장(국제어시대의 민족어/문학과지성社/1998)’이 실현되었다는 가정하에 500년의 미래 한국사회를 상상해보는 내용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책이 사회과학 분야로 분류되어있지만 실상은 전지적 시점의 소설에 가까워보인다는 것이다. 목차를 살펴보면 그 사실은 더욱 분명해진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2023년을 영어공용화의 원년으로 가정하고, 이후 30년,60년,100년,500년의 다섯 시점에서 대한민국의 모습을 이야기하고 있어서 마치 SF소설을 읽는 듯한 기분마저 든다.

각 시점에서의 사건을 간추리면 이렇다. 2023년에는 영어시간이 곧 국어시간이 되고, 관공서/매체가 너도나도 앞다투어 영어를 사용하게 되며, 영어와 함께 영미권의 문화가 순식간에 한국문화를 잠식하게 된다. 이어 한세대가 흘러간 2053년, 영어공용화 세대인 아이들은 가정에서만 사용하는 한국어보다 학교/친구들 사이에서 훨씬 자주 접하는 영어가 더욱 편하다. 그래서 예상치 못한 변화들이 생겨나게 되는데, 첫번째가 세대간의 단절, 두번째가 한국전통의 상실이다. 다시 30년이 지난 2063년, 영미권의 경제와 문화수준을 쫓아가기 위해 영어공용화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빈부의 격차, 세대의 단절, 문화적 주체성 상실은 더욱 악화되었으며, 결국 경제/문화적 차이의 관건은 영어의 사용이 아니라, 국지적 특수성을 얼마나 창조적으로 발휘하느냐에 달렸음을 깨닫게 된다. 이제 2123년, 세계를 호령하던 미국의 아성은 점차 줄어들고 신흥강국으로 중국이 득세하게 되면서 ‘중국어공용화론’이 힘을 얻는다. 이 때의 한국사회의 풍경은 21세기 초의 영어열풍이 불던 모습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다시 400년이 흐른 2523년, 우연히 한국어문법이 보관된 타임캡슐이 발견되어 한국어는 새 생명을 얻게 된다.

책의 내용을 모두 읽고 나면, 500년 후의 상황을 한국어의 영속성을 바라는 희망의 대단원으로 치부한다 하더라도, 그 이전의 네 시점은 전혀 허황되어 보이지 않는다. 그 이유로, 영미 문화가 한국의 문화를 잠식한다는 가정이, 조선말기 일부 개화파들에 의해 일본에 강제 합병된 이후 나랏말을 잃으면서 전통이 단절되었던 시절과 매우 흡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대간의 단절이 생길 것이라는 가정이, 해방이후 미군정이 들어오면서 서구문화와 전통문화간에 격렬한 충돌이 생겼던 경험과 무척 닮았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 책의 부록으로, 2003년 당시 벌어진 열띈 찬반논쟁의 자료들도 정리해두어서, 단순히 상상에 입각한 비관적 논리 이외에 개인이 합리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여지도 남겨두었다.

이 책의 출간시점은 2003년 이므로 ‘영어공용화’라는 특정주제에 대한 시의성은 다소 떨어지지만, 8년 이상이 지난 지금 시점에서도 영어교육은 여전히 과열양상을 보이고 있으니, 아직도 이 책이 시사하는 바는 여전히 크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