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료방송 사업자의 이삭줍기

유료방송 사업자의 이삭줍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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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료방송 사업자의 이삭줍기
2012년 12월을 상상해 본다

MBC 기술기획부 이영호


방송은 기본적으로 규제사업이기 때문에 정책 결정에 따라 많은 영향을 받는다. 지상파 방송사가 생긴 이후로 가장 땅을 치고 후회할 정책 결정은 무엇일까? 수 없이 많은 후보들이 각축을 벌이겠지만, 뭐니 뭐니 해도 난시청 해소와 윈도우 확장을 위해 계약 없이 케이블에 재전송을 묵인했던 정책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상파 방송기술 엔지니어가 가장 후회하는 정책 결정은 무엇일까? 케이블로 난시청이 해소되고 지상파의 윈도우가 확장되는 지상파 고도성장에 도취되어, 직접 수신이라는 스스로의 의무이자 권한을 내팽개쳐 방치한 것이 아닐까?

현대사회에서는 유통을 장악한 쪽이 생산자들을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다. 대형마트는 소비자와의 접점을 형성하여 끊임없이 생산자들을 무한 경쟁시킬 뿐 아니라, 진입장벽이 낮은 제품의 경우 아예 PB상품을 만들어서 그 이윤을 독점한다. 이 유통망에서 차단되면 소비자를 만날 기회가 없으므로 생산자는 어떠한 조건이라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생산자가 취할 수 있는 옵션은 두 가지다. N사의 모 라면처럼 유통사가 절대 거부할 수 없는 제품을 계속 만들어 내던지, 대선후보의 출신사인 Y모 회사처럼 구멍가게에 독자 영업망을 구축해서 대형 유통사의 영향력을 최소화 하던지. 이 규칙의 적용에는 방송사도 예외가 없다. 초대박 히트작을 한 번도 빼놓지 않고 계속 내놓던지, 아니면 플랫폼으로 불릴 수 있는 대시청자 접점을 최소한으로라도 가지고 있던지. (다소 과장임은 인정한다.)

2006년 말 기준으로 종합유선방송에 가입한 시청자는 1200만이 넘는다. 가입한 시청자들이 원하는 것은 다음 두 가지였을 것이다. 지상파 방송의 안정적 수신과 다양한 프로그램의 시청. 다양한 프로그램의 시청은 주파수 및 아날로그 방송기술의 한계로 어차피 지상파가 해결할 수 있는 사안은 아니었으니 일단 논외로 하자. 지상파 방송이 깨끗한 품질로 수신되려면 첫째로 방송사의 송출 커버리지가 확보되어야 하고, 둘째로 잘 관리되는 공시청설비가 필요하고, 마지막으로 각 가정에 TV수상기가 있어야 한다. 이 세 단계에서 지상파 방송사의 역할은 송출 커버리지 확보까지이고, 둘째, 셋째 단계는 엄밀히 말하면 시청자의 영역이다. 한마디로 알아서 하시라는 것이다. 선택은 시청자 여러분의 것이니.

설상가상으로 잠정적이지만 2012년까지는 디지털전환을 완료해야 한다. 제작, 송출 시설을 모두 디지털로 교체하는 방송사 측면에서의 일도 재원, 인력 등 아득하지만, 더 큰 문제는 시청자 영역에 있다. 그 동안 방치되어왔던 둘째 단계의 공시청설비의 업그레이드 및 유지 관리 문제는 현재 누구의 의무이자 권리도 아닌 상황이다. 설비의 실질적 소유자인 시청자들은 이러한 사실도 모르거니와, 안다 해도 그 효용을 얻기 위해 전화 한통 하는 것 이상의 품이 든다면 꼼짝도 하지 않을 것임을 우리도 안다. 그 증거가 우리 엔지니어들도 거의 대부분 케이블, 위성, Pre-IPTV 등의 유료 방송을 통해 지상파를 시청하고 있다는 것 아닌가. 왜? 어느 정도 비용을 지불해도 전화 한통이면 수신의 모든 것을 책임져 주는 케이블, 위성, Pre-IPTV 사업자들이 있으니까. 이러한 상태에서 디지털전환이란 주머니에 동전을 가득 넣고 재주를 넘는 것과 동격이 아닌가 싶다. 동전이 바닥에 우수수 떨어지면 유료방송 사업자가 앞 다투어 나타나 이삭줍기를 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2012년 12월을 상상해 보자. 지상파 방송사가 아날로그 신호 송출을 종료하고 디지털 신호만 송출하게 된다. 본인은 다음 중 어떤 옵션을 선택할 지 마음속으로 생각해 보자. 다음 휴대폰을 뭘 살지 진지하게 고민하듯이. (물론 DTV 수상기 부분은 D-to-A 컨버터로 교체 가능하고, 발생 가능한 가짓수는 아주 많지만 간략하게 3개만 제시한다.)

옵션 1.
관리사무소에 전화해서 공시청으로 DTV 수신이 가능한지 확인한 후, DTV 수상기를 구입, 지상파 HD 5채널을 깨끗하게 수신한다.

옵션 2.
관리사무소에 전화했는데 공시청으로 DTV 수신이 불가하여, DTV 수상기와 실내 안테나를 구입하여 조립하고 케이블을 빙 돌려 벽에 구멍을 뚫어 연결한 후에 안테나 방향을 조정하면서 각 채널 상태가 양호함을 체크하여 지상파 HD 5채널을 깨끗하게 수신한다.

옵션 3.
그냥 유료 사업자에게 전화해서 요금을 물어 합당하면 가입하고 만다.

무엇이 현실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미래로 느껴지는가? 바로 지금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면 필자는 3번에 베팅하겠다. 두서없이 논점 없이 우왕좌왕 써오면서 주장하고 싶었던 것은 이것이다. 이제 지상파도 약간의 비용지불의사가 있는 시청자 또는 공동주택 단지에 수신 서비스를 전화 한통으로 제공해야 한다는 것, 또한 지불 능력이 없는 시청자에 대한 지원 정책을 정부차원에서 추진하도록 지금부터 강하게 주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플랫폼으로서의 최소한의 지위를 상실한 지상파는 생산자의 입장에서 유통의 횡포를 힘겹게 겪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무료 보편적 서비스‘라는 지상파 방송의 정체성 역시 시청자가 그 혜택을 실감할 수 없다면 의심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