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방송 패러다임에 기계의 숨결을 넣다

[사설] AI, 방송 패러다임에 기계의 숨결을 넣다

283

[방송기술저널=박상영 EBS 정보보호단 선임] AI, 방송 현장의 새로운 동반자
AI가 방송 제작 현장에 등장한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지만, 그 파급력은 눈에 띄게 확산되고 있다. 자막 자동 생성, 영상 클립 분류, 음성 텍스트 변환, 콘텐츠 요약 등 다양한 업무에서 AI는 빠르고 정밀하게 작업을 수행하며 사람의 수고를 덜어준다.

최근 대규모 다큐멘터리 시리즈 제작 과정에서는 매우 많은 분량의 인터뷰 영상을 AI 분석 툴로 정리해 핵심 장면을 도출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대폭 줄였다. 이와 같은 기술은 콘텐츠 기획자나 PD, 편집자들이 창의적인 작업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또한, AI는 뉴스 영상 속 특정 장면이나 인물, 자막 정보를 검색해 자동으로 분류하고, 심지어는 감정 분석을 통해 ‘화제성 있는 구간’을 미리 제안하기도 한다. 이는 특히 디지털 플랫폼용 숏폼 콘텐츠 제작에 있어 기민한 의사결정을 가능하게 한다.

기술의 발전이 인력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역량을 증폭시키는 방식으로 작용할 때, 방송 제작은 더 창의적이고 신속한 방향으로 진화할 수 있다.

기술의 그림자: AI가 남기는 불안
하지만 AI가 방송기술과 제작에 긍정적인 역할만 하는 것은 아니다. 기술은 언제나 양면성을 지닌다. 내부 시스템에 AI를 연결할 경우, 사내 자료와 민감한 정보가 외부 서버에 노출될 위험성도 함께 발생한다.

예를 들어, 회사 내에서 회의록 자동 작성과 요약을 위해 외부 생성형 AI 툴을 시범 도입하여, 회의를 진행하다가 회의 내용 중, 인사 정보나 기획 예산안이 외부 서버에 저장되는 사고가 발생할 수 있다. 이는 해당 AI 서비스가 클라우드 기반이었고, 사용자 데이터 학습에 활용될 수 있다는 약관 조항을 사전에 인지하지 못함에서 비롯될 수 있다.

공영방송처럼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며, 정책·교육·문화 등 공공 콘텐츠를 다루는 조직에서는 이러한 문제는 더욱 민감하게 다뤄져야 한다. 단순히 기술을 ‘쓸 수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정보 주권 침해, 책임 소재 불명확성, 업무 기밀 유출 가능성을 모두 고려해야 한다.

AI 도입은 곧 정보보호 및 내부 통제 시스템의 재설계와 맞물려야 하며, 법적·윤리적 기준을 반영한 가이드라인 마련이 선행되어야 한다.

단순화된 업무, 단순화된 역할?
AI는 반복적이고 단순한 업무를 빠르게 수행할 수 있지만, 이로 인해 일부 방송기술직의 역할이 축소되거나 직무의 정체성이 흔들릴 가능성도 크다.

예를 들어, 기존에는 자막 편집자가 수작업으로 뉴스 대본을 듣고, 타이밍을 맞춰 텍스트를 삽입했지만, 지금은 AI가 음성을 자동 인식해 자막을 생성하고 타임 코드를 맞춰준다. 기술자는 이제 이를 검수하고 수정하는 역할로 전환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효율성’이라는 이름 아래 전문성과 창의성을 요구하던 영역이 AI의 보조 단계로 밀려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더 큰 문제는 이 변화가 구성원과의 사전 협의나 충분한 이해 없이 진행될 경우, 업무 만족도 저하, 경력 경로 단절, 조직 내 갈등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AI는 보조 도구이지 사람의 자리를 대체하는 존재가 되어선 안 된다. 오히려 AI가 단순 작업을 맡고, 사람은 콘텐츠의 품질을 감별하고, 스토리텔링의 맥락을 읽어 내는 고차원적 역할에 집중하는 방향으로 역할을 재조정해야 한다.

조율과 협의, 그리고 공영방송의 책임
기술은 어디까지나 도구이며, 그것을 어떻게 설계하고 운용할지는 사람의 몫이다. 방송 현장에서 AI 도입은 효율성 증진이라는 측면에서는 유의미하지만, 그 이면에는 노동 구조의 재편, 업무 재정의, 조직 문화 변화 등 깊이 있는 논의가 필요하다.

특히 공영방송은 단순한 기술 트렌드 추종이 아니라, 사회적 책임과 공공성이라는 기준을 중심으로 기술 도입을 판단해야 할 의무가 있다. AI 활용을 둘러싼 각 부서 간의 이해 차이나 혼란을 줄이기 위해서는, 모든 직무와의 충분한 조율과 협의가 반드시 병행되어야 한다.

향후에는 AI와 인간의 협업 방식에 대한 사내 교육, 윤리 기준에 기반한 가이드라인 제정, 정보보호 전담 부서와의 연계 등 보다 체계적인 전략이 요구된다. 방송기술자는 단순히 기계를 다루는 기술자가 아니라, 콘텐츠 제작의 동반자이자 기술을 통해 공공가치를 실현하는 전문가여야 한다.

AI는 더 나은 방송을 위한 수단이지, 결코 목적이 되어선 안 된다. 우리가 만들어 가야 할 미래는 기술 중심이 아니라, 사람 중심의 기술 활용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