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에서 노조 깃발이 나부끼는 이유

[기고] SBS에서 노조 깃발이 나부끼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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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기술저널=정형택 전국언론노동조합 SBS본부 본부장] 10월 26일은 SBS 노동조합이 첫 깃발을 내 건지 23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일터에서 노동의 가치와 노동자의 권리는 조합이 처음 설립됐던 1998년 당시 수준보다도 후퇴했습니다. SBS 사측이 노사관계의 헌법과도 같은 단체협약을 지난 10월 3일 일방적으로 해지했기 때문입니다.

무단협은 과거 악덕 기업들이 노조 와해를 목적으로 행했던 악랄한 수단으로 최근에는 그 사례를 찾기도 쉽지 않습니다. 이제 SBS에서 공정방송과 노동자의 권리, 자주적 조합 활동은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처지가 됐습니다. 아니 이미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노동의 가치를 존중해 사회적으로 본이 돼야 할 언론사에서 단체협약 해지라는 퇴행적 행태를 벌인 사측을 향해 연일 언론계와 시민사회, 정치권에서 날카로운 비판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대주주만을 바라보는 사측의 행태는 SBS 31년사의 오욕으로 남았고, 그 부끄러움은 고스란히 SBS 구성원들의 몫으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사측이 단체협약을 일방적으로 해지한 이유는 단협에서 ‘임명동의제’ 조항을 삭제하기 위해서입니다. 사장과 공정방송 최고 책임자에 대한 임명동의제는 지난 31년간 SBS를 숱하게 나락으로 떨어뜨렸던 대주주의 방송 사유화와 보도 개입을 끊어내기 위해 지난 2017년 대주주와 노사 3자 합의로 도입됐습니다. 대주주의 압력과 외부의 부당한 개입에 맞서 독립 경영과 책임 경영을 담보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입니다.

그런데 사측은 대주주가 싫어한다는 이유로 구성원들의 자부심이었던 ‘임명동의제’를 무조건 없애려 합니다. 임명동의제는 소유경영 분리를 통한 공정방송을 담보하는 제도로 언론 노동자의 근로조건에 해당합니다. 어느 노조가, 어느 구성원이 근로조건의 후퇴를 선뜻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저항했고 사측은 단협을 해지하면서까지 노조와 구성원을 윽박지르고 있습니다.

제도가 작동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습니다. 사장과 시사교양, 편성 부문 최고 책임자는 재적의 60%, 보도본부장은 재적의 50%가 반대해야 임명이 철회됩니다. 과반 투표에 과반 찬성이면 법도 만들어지는데, 전 직원의 60%가 반대표를 던져야 임명이 철회되는 겁니다. 투표를 하지 않으면 찬성으로 간주합니다. 주주의 권한을 존중하면서도 적어도 회사를 망칠 인사가 임명되는 것만은 막아야 한다는 절박함과 간절함으로 만들어진 제도입니다. 이걸 지키자는 구성원들의 요구가 무리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구성원들의 오랜 투쟁과 강력한 바람으로 이뤄낸 지난 30년 노사 합의의 성취와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고 노조를 겁박해 흔들려는 사측의 의도는 자명합니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아도 되고, 어떤 견제도 없는 상황을 만들어 더 노골적으로 더 충실히 대주주의 이익에 복무하겠다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이게 시작일 수 있습니다. 무단협을 통해 노조가 무력화되면 임금협상을 포함한 모든 노사 협상에서 구성원의 권리와 가치를 지키는 싸움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됩니다. 사측이 ‘대등한’ 노사관계 대신 ‘굴종적’ 관계로 재정립하려는 게 바로 이 때문입니다.

사측이 어떤 협박과 회유를 하더라도 노동자의 권리와 공정방송의 가치, 자주적 조합 활동의 보장이 빠진 ‘엉터리 단협’, ‘악성 단협’ 체결을 단호히 거부하겠습니다. 대신, 무단협을 초래해 일터의 갈등을 조장하고 구성원에게 불안과 좌절을 겪게 하며, 언론사가 노동을 탄압한다는 치욕을 자초한 것에 대한 책임을 분명히 묻겠습니다. 그래야 사측이 단협을 가벼이 여겨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또다시 단협을 일방적으로 해지하는 잘못을 반복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게 23년 전 SBS에서 노동조합의 깃발이 처음으로 나부낀 이유입니다.

존경하는 방송기술인 동지 여러분, 공정방송과 노동의 가치를 지키려는 SBS 구성원들의 싸움에 지지와 연대를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