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글은 『월간 방송과기술』 2023년 3월호에 실린 원고입니다.>
[방송기술저널=최홍규 EBS 창의융합교육부 연구위원/미디어학 박사] 일본의 만화작가 이노우에 다케히코의 <슬램덩크(SLAM DUNK)>가 처음으로 발간된 게 1990년. 올해가 2023년이니 <슬램덩크> 만화의 캐릭터는 현시점으로부터 33년 전에 태어난 셈이다. <슬램덩크>의 고교 농구선수 캐릭터들이 실제 살아있는 사람이었다면, 그들의 현재 나이는 아마 40대 후반에서 50대까지도 되었을 것이다.
33년 전의 만화 <슬램덩크>의 광팬이었던 필자의 설렘은 바로 가슴 두근거리는 꿈을 공유했던 캐릭터들과 다시 만난다는 기대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누런 종이의 만화책 <슬램덩크>가 영화로 어떻게 표현될지, 어떠한 영상기술을 선보일지, 영화로서 흥행할 것인지. 흔히 원작 만화나 소설이 영화로 개봉될 때 가질 수 있는 그런 기대감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그저 필자는 33년 전 자신의 꿈을 향해 용감하게 한 발짝씩 나아갔던 그 살아있는 캐릭터들을 만나고 싶었다. 강백호, 채치수, 서태웅, 정대만, 송태섭!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떨려오는 그 북산고등학교의 농구부 형들이 아직도 나에게 감동으로 다가올지 빨리 만나고 싶었던 감정이 강했다.
추억과 기억의 재구성
누가 봐도 만화 <슬램덩크>의 주인공은 강백호였다. 빨간 머리의 문제아 강백호가 농구를 좋아하는 여고생 채소연을 짝사랑하면서 전개되는 줄거리가 만화 <슬램덩크>의 핵심적인 플롯을 차지한다. 하지만 영화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북산고등학교 농구부에서 포인트 가드 포지션을 소화하는 송태섭의 시선으로 그려진다.
영화에서 송태섭은 어린 시절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집 안의 기둥 역할을 했던 농구천재 형에게 농구를 배우며 자란다. 그런데, 그 형마저 세상을 떠나게 되면서 송태섭은 농구를 자신의 삶을 지탱하는 수단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송태섭의 시선으로 그려진 영화의 줄거리는 충분히 울림이 있고 감동적이다. 영화 초반부터 눈물을 훔치는 관객이 많은 것은 만화 <슬램덩크>의 오랜 팬들이 이제 중년에 접어들어 최루성 감성에 취약해졌기 때문(?)만은 아니다. 만화에서는 마냥 쾌활하게만 기억되었고 ‘이한나’라는 농구부 매니저와 귀여운 러브라인을 형성했던 송태섭의 캐릭터적 반전이 많은 팬들의 시선에서 새롭게 다가왔기 때문도 있다.
그만큼 영화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우리가 그간 품어왔던 만화 <슬램덩크>에 대한 추억과 기억을 재구성하며 전혀 새로운 작품으로 거듭났다고 느껴진다. 오랜 팬들이 만나고 싶어 했던 강백호 캐릭터는 여전히 재미있고 매력적이었지만, 그보다 더 묵직한 스토리의 중심에 송태섭을 위치시켰던 것은 역시 감독이 오랜 세월 기다려온 팬들의 감정을 다룰 줄 안다고 느껴지는 대목이었다.
뻔하지 않은 연출
만화 <슬램덩크>의 재미는 느린 호흡에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만화 <슬램덩크>에서는 북산고등학교가 다른 학교들을 만나 경기를 펼치는데, 그 경기의 중간중간 아주 긴박한 상황에서 느린 호흡으로 이어지는 대사들이 큰 재미를 줬었다. 가령 레이업 슛이나 3점 슛 장면 한 컷에도 캐릭터가 느낄만한 감정이나 독백들을 느리게 담아내 독자들에게 감동과 재미를 줬었다.
하지만, <더 퍼스트 슬램덩크>에서 그런 장면을 기대한 팬들은 약간 실망스러울 수 있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결정적인 장면을 굳이 여러 대사와 독백으로 늘어나도록 하지 않는다. 이 영화의 가장 결정적인 장면이라고 하면 영화의 막바지인데, 시소게임을 하던 중 강백호의 마지막 점프슛까지의 샷들은 매우 빠르게 전개된다. 그 순간에는 쓸데없는 대화나 음악이 없다. 영화에서 관객들이 가장 집중해야 할 그 장면에서 감독은 만화와는 다른 전개 방식을 선보인 것이다. 고전 슬램덩크를 기대하고 영화관을 찾은 관객들이 어리둥절할 법도 하지만, 영화의 연출력이 신선해서 오히려 숨을 죽이고 마지막 장면들을 지켜보게 된다. 뻔하지 않은 연출, 그 감동은 오랜 잔상을 남긴다.
영화 전반에 흐르는 묵직한 분위기 속에서 강백호 캐릭터 특유의 발랄함이 변색하지 않았다는 점도 특별한 연출력의 발로라고 본다. 만화 <슬램덩크>는 TV용 애니메이션 시리즈도 출시된 바 있는데, 기본적으로 TV 시리즈의 톤은 영화만큼 묵직하지 않아서 강백호의 장난기 섞인 등장 장면들이 어색하지 않았다. 하지만, 영화는 초반부터 어둡고 무거운 톤으로 시작하기 때문에 관객들로 하여금 강백호 특유의 캐릭터가 어떻게 그려질지 궁금하게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강백호는 묵직한 내내의 분위기 안에서도 발랄함을 유지하며 영화 중간중간 웃음을 선사했다.
그리 우스꽝스러운 영상효과나 효과음을 쓰지 않았음에도 강백호의 등장이 발랄함을 유지할 수 있었던 데는, 영화에 스며있는 견고한 연출력의 영향력이 컸다고 본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애니메이션의 형태로 영화 상영관을 차지했으니, 많은 관객이 이 영화를 영화 ‘작품’이 아닌 시간 보내기용 오락물쯤으로 여겼을지 모른다. 영화를 실제 관람하지 않은 관객들이라면 아직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영화를 보고 나면 안다. 비극과 희극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영화라는 포맷의 ‘작품’이 만들어질 때, 관객에게 얼마나 깊은 인상을 남길 수 있는지를 말이다. 그리고 심지어 애니메이션도 관객에게 이런 인상을 남길 수 있구나. 하는 점도 알게 된다.
모두 승자가 된 게임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농구영화다. 스포츠 영화의 특징은 무엇인가. 승자와 패자가 있고 관객들은 주인공이 취득할 승패라는 결과를 따라가며 영화의 결론부에 이르게 된다. 대개의 스포츠 영화에서는 주인공이 꼭 승리해야 하는 상황을 줄거리로 설정하기 때문에, 관객들은 영화를 보는 내내 주인공이 상대팀에게 승리하기를 바란다. 이 영화도 마찬가지다. 꼭 만화 <슬램덩크>의 팬이 아니라고 해도, 영화 속 송태섭이라는 주인공의 인생을 간접적으로 체험하며 그가 속한 북산고등학교가 승리하기를 바라게 된다.
하지만, 북산고등학교 상대로 맞붙은 산왕공고는 이명현, 신현철, 정우성이 있는 고교 최강팀이다. 특히, 정우성은 우리나라 팬들에게 익숙한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모든 포지션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초고교급 선수로 묘사된다. 그런 산왕공고를 북산고등학교가 이겨내는 과정은 힘겨운 과정일 수밖에 없다. 농구라는 스포츠는 특성상, 신체조건과 축적된 능력에 따라 클래스가 명확히 구분되지만 ‘고교’농구라는 변수가 있고, 산왕공고만큼이나 많은 노력을 해온 북산고등학교 선수들이기에. 관객들은 북산고등학교의 승리에 자그마한 희망을 품고 경기를 지켜보게 된다.
필자가 이 원고에서 북산고등학교와 산왕공고의 경기결과를 다룰 필요까지는 없다고 본다. 영화를 스포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다. 영화가 끝나고 나면 알게 된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에서는 승패가 중요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북산고등학교 상대팀 에이스인 정우성의 시각에서 승리와 패배의 의미가 무엇인지. 영화 크레딧이 올라갈 즈음 관객들은 그 깊은 의미를 다시금 깨닫게 된다.
이것은,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성공 요인 중에서도 가장 가치 있는 성공 요인이다. 스포츠 영화라는 장르에서 보여줄 수 있는 가장 큰 감동과 의미를 선사해주었기 때문이다. 스포츠 경기도 인간사의 한 장면이고, 운동선수에게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내는 하나의 과정이라는 점을. <더 퍼스트 슬램덩크>에서는 몇몇 복선으로 멋지게 구성된 것만으로 관객이 이 스포츠 영화를 선택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만들어진 셈이다.
영화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보고 난 오래된 팬들이 최근에는 만화책 <슬램덩크> 구매에 다시 열을 올리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이미 한 번의 정상을 맛본 이 농구 콘텐츠는 다시 역주행을 시작하고 있다. 역시 한번 팬심을 끌었던 콘텐츠의 힘은 강력하다! 오래된 팬들을 실망시키는 일이 없는 한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