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 유감

[칼럼] 이웃 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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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기술저널=오건식 전 SBS 국장] 필자가 하루 용돈을 20원쯤 받던 시절, 방과 후에는 대부분 5원짜리 빙과류인 아*나(이 께끼 지금도 나온다. 몇 년 전에는 콘도 나왔다)를 맛있게 즐감했다. 원데이, 지금도 판매하는 빙과류 중에 누*바라는 제품이 출시됐다. 누*바의 당시 가격은 무려 20원. 하루 용돈 전부를 털어 넣어야 먹을 수 있는 빙과류로 당시 초딩 입맛에는 맛만큼은 아*나와 비교가 안 될 정도였다. 하지만 초등 산수로만 생각해 보아도 누*바를 먹는다는 것은 너무나 대책이 없는 일이었다. 누*바를 하나 먹으면 다음 날까지 긴 인고의 시간을 견뎌야 하니까.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당시의 필자는 YOLO족이었던 것이다. 필자가 우리 민족의 대표는 아니지만, 우리 민족의 DNA에는 일단 지르고 보는 인자가 분명히 있다고 생각한다.

지난 7월 일본의 수출 규제에 이은 화이트리스트 배제는 우리 민족의 DNA를 몰라도 너무 모른 조치라고 생각한다. 일반적 분석으로는 일본의 조치가 작년 가을 대법원의 징용 판결에 대한 보복이라고 하지만, 결정적 트리거는 지난 4월의 후쿠시마산 수산물 수입 규제 관련 WTO 제소 2심에서 1심과 달리 일본이 역전패를 당한 것이 컸다고 본다. 우리나라도 큰 기대를 안 했던 만큼 WTO 소송에서 진 일본의 충격은 매우 큰 것으로 알고 있다. WTO 체제하에서 WTO 소송 결과에 승복 못 한다고 하면 모순이므로 전혀 근거가 없는 안보상의 문제를 걸었던 것이리라. 본인들은 5공 때 회자된 문구처럼 ‘외곽을 때리는 노련한 한 수’라고 생각들 하는 것 같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했던 이들은 모두 역사의 준엄한 심판을 받았다. 과거를 생각하는 사람들은 대한민국의 1990년대를 대단한 시기로 기억할 것이다. 한류의 기초 체력이 이 시기에 만들어졌고, 그 영향인지 그 당시 일본 국민의 60% 정도가 한국에 친근함을 가지고 있다는 조사 결과도 있었다. 직접 관련성은 모르겠지만 이러한 영향으로 2004년에 일본이 우리나라를 화이트리스트에 넣게 됐다고 본다. 국민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라를 화이트리스트에 넣을 위정자는 없을 것이다. 화이트리스트에 등재할 조건은 국민들이 좋아하거나 생판 모르는 나라이거나.

역사적으로 학문의 다양성이라는 명제 아래 숨어서 궤변을 늘어놓는 이들도 있다. 얼마 전 모 방송을 통해 ‘반일 종족주의’의 저자 중 한 사람이 일본강점기에 조선인과 일본인을 평등하게 대우했다고 주장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사실 ‘종족’이란 단어는 매우 불쾌하다. 그 자체가 비하의 의미가 내포돼 있다) 저자는 총독부가 기업들에게 조선인에게도 동일한 임금을 지불하라는 공문을 보낸 일이 있다는 것을 근거로 삼았다고 한다. 이날 방송 출연자는 명쾌하게 당시에 임금의 불평등이 존재하니까 그런 공문을 보낸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 당시 임금 수준은 대부분 2:1이었고, ‘동일 노동 동일 임금’에 기초한 조선인의 불만이 증폭되니까 시정하라는 시늉을 보인 것이다. 약속을 잘 지키는 친구에게 ‘너 인마, 약속 잘 지켜~’라고 한다면 아마 사회에서 매장당할 가능성이 클 것이다.

방송기술도 우리나라 최초의 방송국이 일제강점시대에 생겨서인지 일본의 영향이 큰 것 같다. 용어부터 일본에서 유래된 것들이 많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우리 방송기술계에는 지일파는 많아도 친일파는 없는 것 같다. 버뜨 방송기술계도 향후 이웃 나라의 본성을 잘 알고 대처해야 한다고 본다. 1980년대에 일본 NHK 기술연구소에 연수를 간 적이 있었다. 필자의 성향에 따라 방송기술 연수도 중요하지만 퇴근 후 NHK 기술연구소 직원들과 화기애애한 자리가 더(?) 중요했기에 당연히 여러 번 참석했다. 필자가 알기에 낮에는 조곤조곤한 성격의 방송기술 연구원들이었지만, 저녁 시간 이후에는 절대로 조곤조곤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자기들끼리의 대화였지만 ‘축생’이란 불편한 단어가 자주 나왔고, 얼굴 붉히고 끝난 경우도 많아서 그들의 호전성을 잘 알게 됐다. 물론 일본과 일본인은 구분돼야 하겠지만, 그네들을 위해서 비행기에서 산 양주를 주저하지 않고 개봉한 필자의 행동을 크게 후회하고 있다. 80년대에는 일본도 고급 양주를 쉽게 대할 수는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업무적 면에서는 한 달 정도의 기간이었지만 배운 것보다는 두드려 보고 돌다리를 건너는 그들에게 ‘닥치면 한다’는 한국인의 자세를 더 많이 보여준 것 같다. UHDTV 이후에도 각종 방송통신 표준의 제정 등에 한국과 일본은 부딪칠 일이 많을 것이다. 앞으로도 극일해야 할 분야는 너무나 많다.

이제 대한민국은 누*바를 먹을 수밖에 없게 됐다. 내일은 없다는 비상한 각오로 적절한 가성비의 ‘아*나’는 잊어야 한다. 얼마 전 작고하신 이용마 기자의 삶처럼 일관되게 살다 보면 다시는 이웃에게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지면을 빌려서 고 이용마 기자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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