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성의 시대에 획일화를 권유받다

[편집위원 글] 다양성의 시대에 획일화를 권유받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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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나 회사, 동창 등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연스럽게 속하게 되는 여러 사회에서 클래식 음악을 즐겨 듣는 사람들을 만나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렇기에 콘서트에 혼자 가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S일보의 인터넷 기사는 사실 클래식에서는 이미 수년 전부터 일반화되고 있었다. 하지만 동호회와 같은 여러 모임에 참석하면 이 땅 이곳저곳에 내가 좋아하는 것을 똑같이 좋아하는 사람들이 적잖게 존재한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그리고 그들의 다양한 취향과 해박한 지식에 또다시 놀라게 된다.
 


나는 그런 자리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클래식 음악에 심취하게 한 곡이 무엇인지 으레 물어보곤 한다. 모태신앙처럼 기억에 없는 시절부터 클래식 음악을 들어왔다면 답하기 쉽지 않겠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던 과거의 순간을 되짚으며 무용담처럼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모태신앙’이 아닌 나도 물론 예외가 아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베토벤의 <영웅 교향곡>으로 클래식과의 첫 만남을 가진 이래, 클래식 음악에 대한 관심은 서서히 앞뒤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우선 동시대인 하이든과 모차르트를 훑은 후 뒷세대인 슈베르트와 멘델스존으로 뻗어갔으며, 여기에 멈추지 않고 슈만과 차이코프스키를 건너 브람스와 말러, 시벨리우스, R. 슈트라우스까지 지경을 넓혔다. 이러는 와중에도 앞세대에 눈길을 돌려 바흐와 헨델, 비발디를 중심으로 바로크 공략에 나서기도 했다.


클래식 음악을 즐겨 듣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씩 겪게 되는 이러한 성장 과정은 취향이 다르더라도 매우 엇비슷한데, 이것은 조성의 확립과 발전이라는 음악사적 흐름 때문일 것이다. 조성이라는 절대적인 시스템은 이들을 하나의 연결고리로 묶을 수 있는 바탕이 되며, 클래식 음악을 다가가는 가장 빠른 길이기도 하다.


물론 현대음악도 이러한 흐름이 존재한다. 쇤베르크의 12음 기법은 안톤 베베른과 알반 베르크로 이어간다. 베베른은 12음 기법의 기본음렬을 수직적으로 사용하면서 화성적인 모티브를 만들었으며, 악기를 모자이크처럼 사용하면서 ‘점묘 음악’, 더 나아가 ‘음색 작곡’을 선보였다. 베르크는 무조음악과 12음 기법을 자유롭게 사용하면서 고전적인 구성을 도입하여 현대적인 신고전의 모델을 제시하였다.


새로운 음악에 관심을 갖고 있던 젊은 메시앙은 12음 음렬 작곡 기법의 개념을 음정뿐만 아니라 음 길이와 샘여림에도 적용하는 실험을 감행했으며, 그의 제자인 불레즈는 이를 보다 확대 적용하여 ‘전음렬음악’ 혹은 ‘총렬음악’을 확립시켰다. 조성의 완성과 확장이 300년에 걸쳐 진행되었다면, 12음 기법으로 시작한 음렬 음악은 불과 30년 만에 성장과 발전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하지만 불레즈 본인도 총렬음악 작곡을 중단했을 뿐만 아니라, 리게티에 의해 실천적 구조의 허점이 지적되면서 폐기처분의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이후 음렬이라는 획기적인 시스템은 작곡 방법 중 하나로 그 위상이 급격히 격하되고 말았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했다. 1950년대 모든 아방가르드 작곡가들이 신봉했던 음렬기법이 현대음악의 왕좌에서 끌어내려지면서, 그 자리에 앉힐만한 마땅한 대체물을 미처 마련해두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 장본인이었던 리게티가 ‘음향음악’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음악을 주창하기는 했지만, 이에 동참한 동시대 작곡가들 사이에서도 공통되는 시학(詩學)적 토대 없이 제각각 자기만의 방식을 고집하면서 미숙한 후보들만 즐비한 상황이 되었다. 사실 이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음향음악이 ‘음렬 음악의 작곡은 계산에 의해 음악 요소가 선택되어지기 때문에 작곡가가 그 소리를 결정할 수 없다’는 비판에서 출발했기 때문이었다. 즉, 음향음악은 태생적으로 작곡 기법에 대한 이론적 배경을 갖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어쩌면 그들은 왕좌의 권위 자체를 부정하고 싶었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왕을 세움으로써 스스로 새로운 억압의 틀에 얽매이기보다는 자유인으로 살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음향음악은 훌륭한 탈출구가 되었으며, 이후의 작곡가들은 각자가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음악을 쓸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1960년대를 주름잡았던 음향음악 삼인방도 마찬가지였다. 리게티는 음향에서 리듬으로 관심의 무게를 옮겨놓았으며, 윤이상과 펜데레츠키는 각각 신고전과 신낭만으로 기울면서 각자의 길로 흩어졌다. 라헨만은 악기를 새로운 방법으로 연주하며 20세기 후반 아방가르드의 기수로 떠올랐고, 바스크스는 그 반대로 낭만 음악을 재현했다. 이러한 와중에 슈니트케는 이러한 모든 양식을 하나의 작품에 담는 대통합을 시도했다.

이것을 보면, 후대 사람이 20세기 음악의 역사를 ‘가치의 상실이 가져온 혼란의 시대’라고 평가할 것이라는 한 피아니스트의 말은 어느 정도 수긍하게 된다. 하지만 나는 그 피아니스트에게 ‘20세기는 다양성이 새로운 가치를 부여받은 시대’라는 말로 바꾸어 제시했다.


지난 일요일 교회에서 국민 통합을 위한 기도회에 참석을 권하는 전단을 받았다. 촛불시위 이후 세뇌가 되도록 들었던 ‘국민 통합’. 4천 9백만 인구가 하나로 통합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혹은 과연 옳은 것일까? 다양성이 미덕이 된 21세기에서는 각자의 개성과 각자의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더욱 자연스러울 텐데. ‘우측 보행’을 강요 수준으로 주입받고 있는 요즘, 길을 걸을 때조차 자아의 상실을 경험하고 있다.


EBS 편집위원 송주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