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 방송산업발전 종합계획, 그 안에 내재된 정부의 노골적인 유료방송 중심 정책과 지상파 방송의 형해화. 모바일 광개토 플랜 2.0과 방송-통신 주파수 쟁탈전, 지상파 MMS와 UHDTV의 미래와 난시청 해소 및 방송 정책 이분화.
현재 대한민국 방송은 거대한 사영화의 바람에 휘둘리고 있다. 정부는 공공의 인프라를 해체하여 사익을 위한 도구로 둔갑시키는 한편, 허망한 경제적 낙수효과를 꿈꾸며 망상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이 상황에서 방송은 자신의 역할을 잡지 못하고 치명적인 방황 속에서 표류하며 보편적 미디어 플랫폼은 조금씩 사양의 길로 접어들고 있다. 대위기의 시대. 백척간두에 선 우리는 시대의 역사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이 기본적인 질문이 우리를 2000년대로 자연스럽게 안내한다.
이에 본지는 새해를 맞아 ‘신년기획, 2014년 방송의 갈 길, DTV 전송방식 투쟁의 역사에서 묻다’를 통해 끈질기게 순환하는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현재와 미래의 비전을 모색해 본다.
1부. 꿈틀대는 DTV 전송방식, 그 뜨거웠던 시간
2014년을 맞이하는 우리가 왜 갑자기 2000년대 중반 DTV 전송방식 투쟁으로 고개를 돌리는가.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하겠지만, 의외로 답은 간단하다. 현실의 불안과 미래의 비전은 과거에서 기인한 역사적 결론에서 생각지도 못한 해답을 찾아내기 때문이다. 게다가 과거의 진실이 현재와 미래에도 현재 진행형이라면, 모든 것은 더욱 명확해진다.
2000년대 중반은 방송의 발전에 있어 아주 중요한 시점이었다. 1996년 12월 24일 미국 FCC(미연방통신위원회)가 ATSC 방식을 공식적으로 승인한 이래, 1997년 3월 28일 대한민국은 지상파디지털방송추진협의회를 구성하고 그해 9월 23일 추진협의회는 ATSC 방식을 지상파 디지털 TV 방송 방식으로 채택할 것을 당시 정보통신부에 제안한다. 그리고 11월 정보통신부는 미국방식을 전격적으로 채택한다. DTV 전송방식에 있어 첨예한 충돌의 지점은 미국식과 유럽식 선택임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은 1997년 주파수 효율이 떨어지고 추후 방송의 발전을 심각하게 저해할 미국식을 택한 것이다.
▲ 2000년 9월 28일 DTV 전송방식 재검토를 위한 시민연책위원회 발족 기자회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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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상황은 숨 가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당장 1998년 5월 대만이 미국방식을 디지털 방송 표준으로 전격 채택하고 뒤이어 영국과 미국도 지상파 디지털 방송을 속속 시작했다. 그러자 대한민국은 1999년 7월 경제부처차관 회의에서 디지털 지상파 TV 조기 방송 종합계획을 채택하며 정책에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해 11월 2일 미국 싱클레어 방송그룹이 FCC에 지상파 DTV 전송방식 재검토를 요청하며 미국식 전송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가 시작되었다. 물론 2000년 2월 FCC가 싱클레어 방송그룹의 청원을 기각했지만 그해 7월 미국 하원은 초유의 전송방식 청문회까지 열어 장고에 들어갔다. 기나긴 싸움의 시작이었다.
2000년 한국방송기술인연합회(이하 KOBETA)는 7월 10일과 24일 두 차례에 거쳐 DTV 전송방식 비교현장 실험을 요청한다. 또 7월 27일 KOBETA는 DTV 변조방식 재검토 요청 질의서를 방송위원회에 발송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부는 요지부동이었다. 이에 KOBETA는 8월 8일 전국언론조동조합연맹과 시청자연대회의와 함께 DTV 전송방식 재검토 촉구를 위한 기자회견을 열어 대정부 압박에 돌입했다. 또 8월 10일에는 조광환 방송위원회 디지털방송추진위원회 위원장 면담과 8월 16일에는 박종웅, 김일윤, 원희룡, 남경필, 정병국, 정동영 의원 등과 연이어 면담을 한다. 8월 19일 정보통신부 장관 면담을 요청했으나 기각되기도 했다. 이에 8월 22일에는 KOBETA 특보가 발행되기 시작했으며 8월 25일 박준영 청와대 공보수석 면담에 이어 9월 28일 성유보 상임대표를 중심으로 시민대책위원회가 발족했다. 이는 10월 4일 당시 집권 여당인 한나라당 문화관광위원회 주최 정책 토론회로 결실을 맺게 된다. 이어진 상황은 급박했다. 10월 18일 기존 입장에서 한 발 물러난 정보통신부가 비교 필드 테스트 조건부 허용 및 지원을 발표했으며 11월 22일 방송위원회가 주관하는 DTV 전송방식 공청회와 12월 8일 토론회가 연이어 열렸다.
2001년으로 들어서며 DTV 전송방식을 둘러싼 논의는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1월 1일 시민대책위원회의 성명서를 시작으로 1월 9일에는 KOBETA가 주최하는 방송위원회 위원 설명회가 열렸다. 2월 21일 방송위원회가 DTV 전송방식 비교 필드 테스트에 대한 재정지원을 표명했으며 4월 20일 한국방송협회 이사회는 방송위원회가 비교 필드 테스트를 실시한다면 협력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이에 4월 26일, MBC가 전격적으로 방송위원회에 비교 필드 테스트 제안서를 제출했으며 5월 2일에는 방송위원회가 그 후속조치로 MBC에 세부 실시 계획서와 예산안 제출을 요구했다. 그리고 5월 3일, 방송위원회는 KOBETA와 정보통신부, 방송위원회, KBS, ETRI, 시민대책위원회에게 DTV 비교 현장 실험 추진협의회 참여를 공식 요청했다. 전송방식을 둘러싼 논쟁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실질적인 테스트가 이뤄지기 직전이었다.
▲ 2001년 2월 12일 DTV 방송방식 국제세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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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5월 11일 정보통신부가 추진협의회에 불참한다는 통보를 내리자 정국은 다시 얼어붙었다. 간신히 구성된 협의회가 반쪽짜리 협의회로 좌초하는 순간이었다. 여기에 미국식 전송방식을 선택한 대만 교통부가 방송방식 불간섭 원칙을 천명하며 유럽식 DTV 전송방식을 선택하자 결국 7월 20일 정보통신부에 대한 DTV 비교시험 방해 규탄 결의대회가 열렸다. 정보통신부의 황당한 방해공작에 방송기술인과 시민사회단체가 적극적인 투쟁에 돌입한 것이다. 이어 7월 23일부터 8월 14일까지 비교시험 촉구 1인 릴레이 시위가 이어졌으며 8월 9일에는 2차 정보통신부 규탄 결의대회가 대대적으로 열리기도 했다. 그러자 결국, 9월 7일부터 11월 30일까지 DTV 비교시험 추진협의회가 우여곡절 끝에 비교시험을 실시했다. 하지만 결과는 정보통신부가 원했던 그대로였다. 12월 12일, 정보통신부는 비교 시험 결과 불안정 및 변경방식 불가를 발표했다.
2002년은 투쟁의 연속이었다. 1월 22일 DTV 전송방식 정치권 관심 촉구 집회를 시작으로 2월 15일, 2월 18일, 3월 13일 연이어 관련 토론회가 열렸으며 3월 19일에는 DTV 전송방식 변경을 위한 소비자 운동이 발족되기도 했다. 동시에 3월 25일부터 DTV 방송방식 변경 촉구를 위한 정보통신부 앞 1인 시위도 분위기를 후끈 달아오르게 했다. 이 과정에서 3월 27일과 4월 11일 정보통신부 장관 면담이 불발되는가 하면, 4월 16일과 4월 23일 각각 방송위원회 위원장과 국회 문광위원장 면담이 성사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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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년 3월 25일 1인 시위(최민희 현 민주당 의원) |
또 4월 26일 국회 과학기술정보통신위원회 위원장 면담도 전격적으로 이뤄졌다. 하지만 상황은 그대로였다. 그러자 5월 28일에는 DTV 불매 가두홍보 및 방식변경 국민서명운동이 시작됐으며 6월 11일에는 정보통신부 규탄 및 방식변경 촉구 결의대회가 대대적으로 열렸다. 또 8월 21일에는 DTV 미국식 결정 백지화 촉구 사회 각계인사 150인 선언이 이뤄졌으며 8월 28일에는 1인 시위 100일을 맞아 DTV 전송방식 조속 변경 강력촉구 결의대회가 연달아 열렸다. 이어 9월 3일에는 당시 대선후보였던 이회창, 노무현, 권영길 대통령 후보에게 7대 국민 요구안 및 공개 요구 서한을 전달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11월 15일, 전송방식 변경 대선 공약화 촉구 결의대회가 열리며 DTV 전송방식을 둘러싼 투쟁은 더욱 불을 뿜기 시작했다. 여기에 11월 28일 MBC PD수첩이 ‘디지털 TV, 소비자는 봉인가’를 통해 정보통신부의 정책을 비판하자 당사자인 정보통신부가 이를 언론중재위원회에 제소해 엄청난 반발이 일어나기도 했다. (2부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