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IT업계에서 3월 20일은 끔찍한 재앙의 날로 기억될 것 같다. 2013년 3월 20일 사상 초유의 인터넷 대란으로 대한민국은 보안 프로세스를 처음부터 다시 재정비하고 구축해야 했으며, 결국 미래창조과학부의 지상파 주요정보통신기반시설 지정시도라는 황당한 방송언론 사찰 가능성도 경험해야 했다.
그런데 해를 바꿔 2014년 3월 20일에는 통신이 문제를 일으켰다. 국내 통신사 점유율 1위인 SKT가 무려 6시간 넘게 장애를 일으키며 가입자들에게 불편을 초래했기 때문이다.
SKT는 2,743만 명의 가입자를 보유한 시장 지배자적 사업자다. 게다가 통화 장애가 발생한 시간이 퇴근시간과 겹친 오후 6시였던 관계로 혼란은 더욱 극심해졌다.
SKT의 이해할 수 없는 안일한 태도도 도마 위에 올랐다. SKT는 통신 장애가 발생한 지 5시간이 넘은 오후 11시 17분이 돼서야 “장애에 사과드린다”는 보도문을 발표했다. SKT 가입자에게 전화가 걸리지 않자 자신이 가입한 통신사의 문제라고 확신한 타 사의 고객들이 KT와 LG유플러스에 문의하자 KT의 경우 오후 7시 26분 “자사 통신망은 정상적으로 운영 중이다”라고 발표한 것과 비교하면 상당히 늦은 공지다.
이 과정에서 기자들이 사실관계 확인을 위해 SKT 홍보 담당자들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직원들의 전화기 또한 먹통이 되는 바람에 취재가 이뤄지지 않은 촌극도 벌어졌다.
게다가 SKT가 20일 오후 6시 25분 복구가 완료되었다는 발표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5시간 넘게, 일부 고객은 다음날인 21일까지 전화기가 먹통이 된 사실은 이해하기 어렵다. SKT는 복구가 완료했지만 직후 통화량이 증대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으나, 통상적으로 재난재해 및 주요 기념일 통화 폭증으로 인한 장애는 30분을 넘기지 않는다는 점을 상기하면 빈약한 해명으로 보인다. 여기에 통신장애가 3시간 이상 지속되면 요금제의 6배를 보상해야 한다는 이용약관에 따라 SKT의 대응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번 SKT의 먹통현상은 가입자 위치를 확인해 전화를 받을 수 있게 해 주는 가입자 위치 확인 모듈(HLR/Home Location Register)에 문제가 생긴 것으로 보인다.
HLR은 통신 가입자의 위치를 확인해 전화를 받을 수 있게 해주고 해당 가입자에 대한 각종 정보를 파악하는 장비로써, 착.발신 금지를 포함한 다양한 부가 서비스를 제어하는 핵심장비다. 이번 ‘대란’은 이 HLR 모듈이 고장남으로써 가입자의 위치를 기지국이 파악하지 못했으며, 당연히 서로 연결되지 않아 생긴 셈이다. 만약 오후 6시 25분 복구가 완료됐다는 SKT의 해명이 사실이라면, 고장난 HLR이 복구 이후 한꺼번에 재가동을 하면서 몰려 있던 통신신호가 한꺼번에 들이닥쳤다는 뜻이다.
문제는 HLR이 절대 고장나지 말아야 하는 핵심장비라는 것이다. HLR 모듈 고장은 통상적인 전화기 사용 외에도 119 및 비상번호까지 먹통을 일으키기 때문에 이중 삼중으로 보호해야 한다. 게다가 기지국 소프트웨어에 오류가 생기거나 모바일 트래픽이 과부하 현상을 보여 먹통이 되면 다른 곳으로 우회하면 되지만, HLR 모듈이 고장 나면 기지국과 가입자 자체가 연결되지 않아 피해는 더욱 치명적이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핵심기술의 고장이 전에도 빈번했다는 점은 더욱 큰 문제다. 실제로 2002년 월드컵 개막일 당시 HLR 고장으로 일부 국번에 해당되는 SKT가 먹통된 사례가 있으며 2007년에는 KT가, 2011년에는 SKT가 비슷한 고장을 일으켜 각각 3시간과 2시간 동안 전화기 사용이 정지된 적이 있었다.
한편, HLR 고장으로 인한 사상 초유의 6시간 통신장애를 일으킨 1위 사업자 SKT의 사례를 바라보며,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공공의 인프라와 민영의 인프라 차이를 새삼 실감하게 되는 부분은 색다르다. 최근 700MHz 대역 주파수를 두고 이를 UHDTV 등 난시청 해소를 포함한 보편적 고품질 미디어 서비스에 활용해야 한다는 방송과, 모바일 트래픽 해소를 위해 해당 주파수를 활용해야 한다는 통신의 입장이 첨예하게 충돌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통신 일각에서는, 아니 심지어 정부 부처의 일부 고위 공무원조차 이제 방송은 공공의 인프라적 속성을 많이 상실했고, 이제는 통신이 그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해당 주파수를 ‘공익적’ 가치로 통신에 할당해야 한다는 주장을 공공연하게 강조하기도 했다.
지금도 기억이 선하다. 제주도에서 열린 모 세미나에 참석한 정부의 모 간부가 발제 도중 700MHz 대역 주파수를 통신에 할당한다는 계획을 골자로 하는 모바일 광개토 플랜을 소개하며 자신의 휴대폰을 꺼내 말했다. “재난이나 급한 일 있으면 TV를 보지 않고, 모두 휴대폰을 확인하죠? 이제 공공의 영역은 방송의 전유물이 아니라 통신의 것입니다”
개인기업으로 운영되는 통신사에게 공공의 영역을 억지로 대입했다는 원론적인 비판과 더불어, 핵심장비 오류로 인해 무려 6시간이나 제 기능을 하지 못한 통신사에게 공공의 인프라를 대입했던 모 간부가 지금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심히 궁금해진다.
그리고 여기서 하나 더, 만약 방송사가 2~3년에 한 번 오작동을 일으켜 ‘정파’가 되고 심지어 퇴근시간 온 가족이 둘러앉는 황금시간에 6시간 넘게 방송을 송출하지 못하면 어떤 일이 생길까? 아마 재승인 과정에서 엄청난 곤혹을 치를 것이다. 당장 방송사 문을 닫을지도 모른다. 공공의 인프라인 방송에게 ‘흔들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은 누구에게 ‘공공이 더 어울리는가’에 대한 질문의 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