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오락 프로그램 속 어린이와 청소년
지정순 (밝은청소년지원센터 미디어 전문위원)
‘방송은 어린이와 청소년을 그 품성과 정서를 해치는 배역에 출연시켜서는 아니 된다’–방송통신심의위원회 <방송심의에 관한 규정> 45조의 내용이다. 그러나 현실의 우리나라 TV 오락 프로그램 속에서 아동(어린이 및 청소년) 출연자에게 맡겨진 배역 내지는 역할, 그리고 아동을 묘사하는 제작 방식은 전반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있다. 문제의 양상 중 가장 심각한 네 가지 범주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아동이 성인들이 휘두르는 무지막지한 폭력의 대상으로 설정되고 있다. 물리적 폭력의 경우 특히 사극의 폭력성이 증가하는 현상과 맞물려서 그 잔인성이 상당히 구체적이며, 폭력의 대상이 신생아 및 영아로까지 확대되었다는 점이 특징이다. 막 태어난 신생아를 살해해 아기의 심장 부위에 피가 흥건한 장면, 신생아를 강보에 싼 채 물속으로 내던진다거나 강보의 아기를 안은 채 전투를 벌이다가 그 강보를 도망자와 추격자 간에 허공으로 내던지는 장면, 강보 속 신생아가 피신해 있는 동굴에 불을 지르는 장면 등은 그동안 지켜왔던 표현양식의 한계를 넘어서는 충격을 안겨주었다. 잠자는 어린이의 목을 성인이 두 손으로 조르며 살해를 시도하는 장면, 어린이를 물구나무서기로 묶어놓은 채 기예단이 칼을 던지는 묘기를 보이는 장면마저 등장했는데, 위와 같은 사극의 장면 중에는 인형을 대역으로 사용한 순간도 있으나 대부분 실제 영유아 및 어린이가 등장했다. 드라마의 사실적 묘사라는 명분을 위해 영아를 비롯한 아역 배우들이 동원되어 겪었을 신체적 불편 내지는 고통과 정신적 공포에 대해 과연 얼마나 사려 깊게 숙고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또 지나치게 충격적인 폭력 묘사가 판단력이 미숙한 아동 시청자들에게 모방행동을 야기할 수 있다는 점, 생명을 경시하는 가치관을 심어줄 수 있다는 점을 과연 고려했는지 우려된다. 아동은 물리적 폭력의 피해자로 등장할 뿐만 아니라 종종 가해자의 역할도 맡는데, 주로 예능 프로그램에서 어린이를 폭력의 가해자로 이용한 코믹폭력이 웃음을 끌어내는 방식으로 연출되고 있다. 폭력의 가해자가 되는 경험이 해당 어린이에게 미칠 영향은 방송 제작자에게 관심 밖인 것으로 보인다. 아동을 향한 언어폭력도 상당해서, 성장 발달과정에서 볼 때 당연한 행동이나 반응조차도 성인의 눈높이에서 비웃음과 조롱으로 대응함으로써 웃음을 끌어내려는 방식은 아동에 대한 명백한 폭력이다. 그런가 하면 성적 폭력도 간과할 수 없는데 진행자를 비롯한 성인이 출연 어린이에게 뽀뽀하자고 강요하거나 아예 뽀뽀를 하는 경우, 게임 벌칙이 상대팀에게 뽀뽀하기인 경우 해당 어린이의 의사와 상관없이 진행되기 때문에 성추행의 관점에서 경계, 지양되어야 한다.
둘째, 아동이 인격체로서 누려야 할 기본적인 권리가 상당 부분 무시당하고 있다. 특히 솔루션 프로그램은 출연 아동의 초상권을 거의 보호하지 않는데, 솔루션 제시라는 명분으로 아동 인권 침해에 대한 면죄부를 얻었다는 착각에 빠진 것으로 보인다. 안전권 무시도 무감각하게 자행되고 있는데 햇볕이 뜨거운 한여름에 차단막은커녕 나무 그늘조차 없는 뙤약볕 아래에 앉아 어린이들이 땀에 젖도록 오랫동안 촬영한다거나 어린이들을 무인도행 배에 태우면서 구명조끼를 입히지 않은 채 촬영을 강행하는 제작방식은 아동이 누려야 할 안전권과 성인이 져야 할 안전보호의 책임을 간과한 처사이다. 인격 무시 또한 빈번해서 늦은 밤 여자 어린이가 찾아가는 화장실에 남녀 어린이를 함께 들여보낸다거나, 남녀 어린이를 한 통 속에 넣고 목욕시키는 연출은 어린이도 인격체로서의 수치심을 느끼며 자존감을 지키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외면하는 무분별한 제작방식이다.
셋째, 동심을 박탈하고 있다. 어린이의 발상이라고 듣기에는 너무나 민망한 수준의 어린이답지 않은 대사, 그것은 분명 제작진의 의도가 다분히 반영된 대사일진대 성인의 눈높이에 고정되어 있는 제작진의 요구에 맞는 대사를 처리해야 하는 어린이 출연자의 인성과 언어생활에 미칠 영향은 제작진의 안중에 없어 보인다. 또 많은 프로그램에서 어린이가 등장하면 으레 기성 가수의 노래와 춤을 시키고 그에 대해 평가를 함으로써 연예인 흉내 내기를 적극적으로 부추기는 실정이다. 이미 동요를 잃어버린 우리 어린이들에게서 동심의 그림자마저 박탈하는 행위로서 성인들이 어린이 정서에 가하는 폭력이다.
넷째, 아동이 선정성을 높이는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 청소년인 경우 특히 심한데 남자 고등학생 스포츠 댄서에게 보기에도 민망한 몸 언어로 성인 남자 연예인을 유혹하는 역할을 하게 한다거나 청소년 탤런트에게 키스 신을 맡기고 더 나아가 연예 프로그램의 리포터가 키스를 해보니 느낌이 어떠냐는 질문을 던짐으로써 청소년이 당황해하는 반응을 즐기는 식의 방송은 청소년을 이용한 선정적 상업성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위와 같이 TV 오락 프로그램은 출연하는 어린이 및 청소년에게 미칠 영향은 뒷전으로 미뤄놓은 채 방송의 자극을 높이는 데만 급급해 그들을 소모적으로 활용하는 실정이다.
그러한 제작방식이 끼치는 영향력은 출연 아동의 품성과 정서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TV 프로그램 속에 나타난 또래들을 바라보는 아동 시청자의 정서와 가치관에도 큰 영향력을 미칠 것이라는 점에서 문제가 심각하다. 성인 출연자가 보여주는 행태보다 또래 출연자의 언행이 아동 시청자들에게 더 민감하고 강력하게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이다.
방송은 우리의 미래인 아동을 성인의 복사판, 애어른으로 만드는 행태를 멈추고 아동이 아동일 수 있도록 제발 놔두어야 한다. 그리고 아동도 독립된 인격체로서 누릴 권리가 있음을 직시하고 그 권리를 보호, 보장해 주어야 한다. 아동을 소품처럼 소모하는 방송은 이제 종식되었으면 좋겠다. 방송이 아동을 다루는 방식은 우리 사회의 성숙도와 선진성을 가늠하는 바로미터이기도 하다는 점을 방송 종사자들이 인식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