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로에 선 OBS 아나운서의 고백 -노변에 서서

[기고] 기로에 선 OBS 아나운서의 고백 -노변에 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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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원기 OBS 아나운서(협회장)

26명.
2007년 12월 OBS가 개국을 한 이후 OBS 아나운서로 근무했거나 현재 근무하고 있는 사람들의 수다. 현재 OBS의 아나운서팀은 14명으로 구성되어 있고 이중 OBS 개국 멤버로 현재 남아있는 아나운서는 6명이다. 20명의 아나운서가 회사를 떠나거나 들어온 셈이다. OBS의 어떤 직종보다 구성원의 변동성이 컸던 곳이 아나운서팀이었다.

흔히 아나운서는 방송사의 얼굴이고 방송의 꽃이라고들 말한다. 그러나 OBS의 이 ‘꽃’들은 아직 제대로 만개한 적이 없으며 향기를 뽐내보지도 못했었다. 늘 미련 없이 떠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으며, 떠나는 이들을 잡을만한 명분이 없었음은 더더욱 씁쓸했다. 그저 잘되라는 말과 축하한다는 말을 해줄 뿐이었다. 아나운서뿐만 아니라 부담 없는 출연료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훌륭하게 인력부족을 해결해줬던 프리랜서 리포터나 MC들 역시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OBS를 통해 성장했고 배웠으며 미련 없이 떠났다. 이런 현상은 비단 아나운서 직종이나 방송진행자들 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은 OBS의 구성원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다.

냉정히 얘기하면 OBS만큼 실력 있고 젊은 인재들이 경험을 쌓고 거쳐 가는 곳으로 적당한 곳은 없는 듯하다. 적어도 개국 초창기만 해도 대내외적으로 OBS는 성장 가능성이 있는, 비전이 있는 그런 회사였고, 또 그렇게 될 거라 믿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OBS의 키는 자라지 않았고 어렵게 태어난 이 신생방송사는 심각한 발육부진을 경험하고 있다. 누적 적자폭은 늘어가고 열악한 처우는 개선되지 않았다. 아니 꽤 오랜 시간동안 그럴 수밖에 없는 구조에 갇혀있었다.

아나운서가 정규직이냐 그렇지 않느냐는 이 직종에 있어서 꽤 중요한 문제다. 수많은 지역 민영방송사와 MBC의 지방계열사들, 종편채널을 비롯한 케이블 채널들이 ‘아나운서’라는 이름을 대단히 쉽게 붙여준다. 그러나 실상은 대부분 최대 2년의 단기 계약직 이거나 프리랜서로 형태의 고용이다. 정규직 아나운서를 뽑는 방송사는 OBS를 위시해 몇 군데 되지 않는다. OBS 공채 1기 신입사원을 선발할 때의 지원인원은 1,000명에 육박했다. 그러나 다년간의 아나운서 공채시험을 치르면서 지원자는 급격히 줄어들었고 경쟁률은 떨어졌다.

고용이 안정적인 정규직 아나운서를 뽑음에도 불구하고 경쟁률이 점점 낮아진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최근 OBS는 이직으로 인한 공백을 메우기 위해 기상캐스터 공채를 진행했다. 100명이 안되는 인원이 지원했고, 그중 30명이 조금 넘는 인원이 카메라테스트를 봤다. 최근 모 방송사의 기상캐스터 공채에는 900명 가까운 인원이 원서를 냈다. OBS의 정규직 아나운서로 일하다 회사를 떠나 케이블스포츠채널의 프리랜서 스포츠 아나운서가 된 한 후배는 일순간 ‘스포츠 여신’으로 칭해지며 시청자들의 주목과 사랑을 받았다. 시청자들의 주목을 받지 못했던, 내부에서도 방송 실력이 늘지 않아 늘 동기들보다 한발 떨어져야했던 후배다. 그러나 신분과 처우는 열악했지만 시청자들이 봐주는 방송에서 그들의 사랑과 관심을 받는 순간 그녀의 모습은 더 아름다웠고 자신감이 넘쳐났다. 내가 아는 그 후배가 맞나 싶을 정도로 진행 실력도 일취월장했고 시청자들은 그런 모습을 사랑했다. 그녀는 지금 KBS의 아나운서가 됐고, 그녀가 OBS 아나운서 출신이라는 걸 아는 시청자들은 거의 없다.

내부 인력들의 사기저하 역시 꽤 오랜 기간 동안 진행되어 오고 있다. 열악한 처우 등을 운운하며 물질적인 보상이 충분치 않음을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아나운서는 조금 다르다. 품위유지나 정규직 같은 것들만이 아나운서를 아나운서답게 하는 것은 아니다. 아나운서로서 역량을 발휘하게 하고 그들을 신바람 나게 하는 것은 시청자의 사랑과 소통과 피드백이다. 시청자의 격려와 관심, 때론 냉정한 평가와 질타도 아나운서에겐 없어선 안 되는 소중함인 것이다. 물론 여전히 OBS는 아나운서 지망생들에게 무척 오고 싶은 방송사임에 분명하다. 아직도 OBS의 가능성은 유효하고 기회는 있어 보인다. 그러나 그들이 평생 젊음과 열정을 바쳐서 방송에 매진할 종착역으로 생각할지 궁금하다.

OBS는 지금 중도한 기로에 서있다. 개국한지 5년… 여러 가지 문제로 표류하던 OBS호의 나침반과 키가 이제 말을 듣기 시작했다. 하늘도 맑아지고 있다. 어디로 가야할 지 목적지를 설정할 수 있게 됐고, 선원들은 노련해졌다. 지금까지 이겨내 온 풍랑과 비바람을 뒤로하고 이제 한줄기 빛을 보고 있는 지금이다. 그러나 미디어렙이라는 예측하지 못한 거대한 빙산이 눈앞에 나타나 OBS에 다시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빙산을 피하지 못한다면 OBS는 침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바다 한 가운데이기 때문에 바다로 뛰어들 수 없는 것은 물론이다.

OBS의 아나운서들은 늘 일당백의 능력을 보여주었다고 자부한다. 또한 앞으로도 그럴 수 있는 능력과 잠재력을 모두 갖추고 있다고 생각한다. 신명나게 방송하고 휘저을 수 있는 판이 깔리고 사람들이 아나운서 개개인의 이름을 불러주기 시작한다면 어떤 방송사 못지않게 훌륭한 인재들이 많다.

몇 번씩 입은 눈에 익은 의상을 입은 후배에게 참 미안했다. OBS의 얼굴은 누구인가, 미래의 그림은 어떤 것인가. 이제는 OBS의 밝은 미래를 선후배들과 이야기하고 만들어가고 싶다, 아니 그래야만 할 때이다. 아나운서 26명의 얼굴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쳐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