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콘텐츠 선언

[칼럼] 신 콘텐츠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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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기술저널=박재성 싱타 대표] 최근 좋아했던 유명 작가가 청년 시절 본인이 읽었던 책에 대한 감상을 적으며 젊은이에게 독서를 권유하는 글을 읽었다. 그 중 ‘공산당 선언’에 대한 글을 보면서 젊은 시절 읽었던 ‘공산당 선언’을 다시 한번 찾아 읽어 보았다. 그 작가가 느낀 것과 같은 감동과 비평은 어릴 적 나에게도 그리고 지금의 나에게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청춘을 보냈다. 그 작가가 청춘 시절 느끼던 세상과는 다르므로 그 감동과 비평을 내가 고스란히 느끼기는 힘들 것이다. 다만, 이해는 됐다. 글로 전해지는 지성에 대한 감동과 그 지성의 절절한 고뇌에 대한 비평을 말이다. 글이 가장 강력한 콘텐츠였던 시절 ‘공산당 선언’의 파괴력은 짐작이 되고, 그 선언이 사회의 긍정적 변화에 분명히 기여했을 것이라는 이해가 됐다.

지금 ‘공산당 선언’과 같은 시대를 변화시킬만한 선언이 글로 나온다면 어떨까? 최근 콘텐츠 변화는 내용과 형식보다는 기술과 확산에서 더욱 급속도로 일어나고 있다. 따라서 그 글 역시 시대를 변화시킬만한 힘이 있다면 과거 ‘공산당 선언’이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주며 세상으로 확산돼갔던 속도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퍼져나갈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과거 ‘공산당 선언’이 나왔을 때의 콘텐츠 양 그리고 소비 속도는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차이가 있다. 단지 글로는 최근 콘텐츠 이용자들의 마음속에 오랫동안 각인되기 힘들다. 오히려 그다음 날 아니 한 시간 뒤에 나오는 감동적인 짧은 글에 묻혀 버릴 가능성이 더 높을 것이다. 최근 콘텐츠는 내용을 쉽게 직관적으로 전달하는 것이 하나의 숙제다. 예전 ‘공산당 선언’ 수준의 난이도라면 끝까지 읽어 볼 인내심을 가진 사람은 매우 드물 것이다.

‘공산당 선언’은 그 시절 청춘과 지성의 가슴 속으로 다가가 많은 새로운 대안을 찾는 노력을 하도록 만들었다. 산업화한 자본주의 사회의 문제점을 변증법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이념을 만들도록 자극하고 글 속에 담긴 생각을 전달했다.

2019년 12월 현재에 그런 선언이 필요한가? 필요하다면 그런 선언이 나올 수 있을까?

수많은 갈등, 커져만 가는 불행한 사람들의 숫자, 물질만능주의와 그로 인한 소외, 기술을 포함한 모든 가치의 자본 지향 등등. 지금 사회도 그 당시 사회만큼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다만, 잘 통제되고 과거 그 시절보다 나빠지는 속도가 줄어들고 있는 정도랄까? 그런데 서서히 나빠지는 것은 더 위험할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게으른 건 인지상정이고, 돌이킬 수 없을 때 그들은 끔찍한 현실을 맞닥뜨리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과거 콘텐츠는 전달만 할 수 있었다. 결론을 정해둬야 하고, 내 통찰이 뛰어나지만 그 통찰을 실천할 방법에 대한 명확한 정답이 없더라도 정답 하나를 정해 놓고 전달해야 했다. ‘공산당 선언’과 ‘자본론’에는 그러한 문제가 있었다. 통찰은 좋았으나 실천하는 방법은 정답이 나올 수가 없는 시절이었다. 정답이 없다고 말하며 답을 함께 찾아보자고 이야기했다면 그 당시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콘텐츠는 이제 더 이상 재미만을 전달해서는 안 된다. 새로운 경험을 통해 감동하게 할 수 있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경험이다. 실생활에서 해볼 수 없는 경험을 가상으로 할 수 있게 하고 느낄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게임의 경우 제작팀이 답을 정해놓을 수는 없다. 경험할 수 있는 세계를 만들어 주고 그 속에서 답을 찾는 것은 유저들의 몫이다. 제작팀이 상상할 수 없었던 답들이 나온다. 그 답의 숫자가 많을수록 제작자의 역량이 뛰어난 것이다.

필자는 이 시대에 필요한 선언을 게임 장르를 통해 구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이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선택하는 다양한 방식을 공유하고 정답을 함께 찾아갈 수 있도록 해줄 것이다. 가상으로 열정적 선택과 냉정한 선택을 모두 해보면서 결론을 함께 토론할 수 있을 것이다. 이념을 모두 걷어내고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과 앞으로 가질 수 있는 것을 이용해 좀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경험을 하면서 이념과 정치 그리고 제도에 대한 보다 냉정한 시각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이 시대에 필요한 새로운 선언이 어느 현자에 의해 게임이라는 장르를 통해서 탄생해 사람들이 새로운 생각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