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 MBC의 김재철 사장이 일방적으로 단체협약 해지를 통보했을 때, 당시 언론노조MBC본부장이었던 이근행 PD는 “단체협약은 민주화 투쟁으로 군사독재 시절을 벗어나면서 얻은 투쟁의 결실이다. 단협 해지는 다시 군사독재 시절로 되돌아가자는 것이다”라고 일갈한 바 있다. 권력의 방송 길들이기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늘 있어왔던 일이다. 이런 현상은 그 자체로 아직 한국의 방송환경이 덜 여물었다는 반증이다.
뿐만 아니다. 최근 몇 년 동안 바야흐로 ‘방송에게 잔혹한 시절’이 흐르고 있다. 2년 여를 끌어온 케이블SO의 지상파 재송신비용 지불거부 사태는 아직도 그 끝이 보이지 않고, 무료 다채널 방송·수신환경개선을 위한 지상파 디지털 전환사업의 행보 또한 주파수 경매제 등 정부의 정책적 소외 속에서 그 속도가 더디기만 하다. 이런 상황에서 외적으로는 종합편성채널 사업자들이 헌법조차 무시해가며 방송시장을 어지럽히고 있고, 방송광고시장은 국회 나랏님들의 무심함에 ‘무법상태’로 방치된지 오래다. 방송사의 내부를 들춰보면 더욱 심각한 내상이 도사리고 있다. SBS는 겉만 번지르한 지주회사 체제가 기업운영 자체를 어렵게 하고 있는 상황이고, MBC 경영진은 뜬금없이 PD수첩 제작진을 대폭 교체하는가 하면,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4대강 정책’을 다뤘던 KBS 추적60분을 표적심의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들을 늘어놓자니 방송사들의 요즘 처지가 한없이 작아보이기만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상황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시선까지도 따뜻한가 하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30년만에 수신료를 올리겠다는 KBS의 다부진 결심은 시민사회단체들의 강력한 반발 때문에 주춤거리고 있고, 케이블SO의 재송신비용 지불거부 사태는 열악한 지상파 직접수신환경이 발목을 잡는 형국이 되고 있다. 그리고 이유가 어찌되었든 방송뉴스의 관제화와 연성화가 시청자들을 지상파로부터 멀어지게 만들고 있다. 다시 말하면 작금의 방송환경은 총체적 난국이다. 외부는 물론이고, 내부적으로도 심각하게 망가져있는 상태여서 어느 곳부터 손을 대야할이지 엄두가 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총체적인 문제를 풀 실마리는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을지도 모른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고 했다. 지금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혹시 스스로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는 이런 현실에 타협하고 있지 않은가? 디지털 전환의 효과가 극소수의 시청자에게만 돌아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정책개선의 가능성을 애써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가? 종편사업자들은 죽기 살기로 방송을 시작하기 위해서 애쓰고 있는데 우리는 현재의 입지와 영향력만을 믿고서 안일하게 대응하고 있지는 않은가? 당신의 심리적 마지노선은 과연 어디까지 인가? 감히 현장에서 열심히 일하고 계신 여러분들을 다그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현실 속의 한계를 자기도 모르는새 체화하고 있지는 않은지 다시 한 번 곱씹어 보자는 것이다.
권력의 방송장악에 대한 가장 강력한 방편은 현장에서의 치열한 투쟁임이 분명하다. 이는 방송사 노조나 각 직능단체들이 앞장서서 부딫혀야할 문제다. 하지만 이런 조직의 움직임보다 앞서야 할 것이 방송인으로서의 자긍심을 지킬 수 있느냐의 문제다. 군사독재 시절에 방송이 시청자들로부터 얼마나 손가락질 받아왔는지, 그 세월들로부터 방송인으로서의 자긍심을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했는지 상기해볼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