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는 무지에서 비롯된다.

[서평] 공포는 무지에서 비롯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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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있으면 공포를 느끼지만 가까이 다가서면 그렇지 않다.’ 퐁테뉴 우화에 나오는 말이다. 멀리 있는 상대나 대상물은 그 실체를 알 수 없기 때문에 그로 인한 불안이나 공포도 크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서 그 대상을 확인하면 공포의 크기가 줄어들거나 사라진다. 이처럼 우리가 흔히 느끼는 두려움은 모르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인권도 마찬가지다. <불편해도 괜찮아>를 쓴 김두식은 “대부분의 공포는 서로를 모르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고, 그 공포 때문에 더 커진 적대감이 문제를 악화시킨다”고 말한다. 우리가 청소년이나 성소수자, 장애인, 노동자, 병역거부자 등을 접하게 되면 그들도 우리와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 같은 ‘동일화’가 바로 인권의 시작이다.

 


<불편해도 괜찮아>는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는 드라마나 영화를 소재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가 그동안 잊고 지냈던 혹은 의도적으로 모른척했던 사람들을 알게 해준다. 영화 ‘방문자’를 통해 본 병역거부자도 그 중 하나다. 영화는 여호와의 증인인 계상을 통해 그들이 우리와 다르지 않음을 보여준다. 오히려 그들은 술은 마시지만 취하는 정도까지 마시는 법이 없고, 욕을 입에 올리지 않으며, 선정적인 영화를 보지 않는 등 우리보다 규범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적인 신념 때문에 전과자가 되고 있다. 영화에서는 6분짜리 롱테이크로 양심적 병역거부자인 계상의 최후진술을 그대로 보여주며 이들이 단순히 자기 몸 편하자고 병역을 거부한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한 장 한 장 넘길수록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이유로 단순히 적대감․이질감의 대상이었던 그들이 이웃처럼 느껴진다. 저자가 기대한 바 그대로 말이다.

 

우리가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서 무심코 지나쳤던 장면들이 이 책에서는 새롭게 태어난다. 저자는 우리를 깨닫게 만듦으로써 불편하게 한다. 영화 ‘300’이 그렇다. 영화 ‘300’에서 스파르타군의 배후를 치도록 샛길을 알려준 배신자 에피알테스는 우리가 흔히 ‘꼽추’라고 말하는 척추장애인으로 묘사됐다. 저자는 이를 장애인 차별이라고 말한다. 역사적 사실과 무관하게 캐릭터를 잘 전달하기 위해 에피알테스를 척추장애인으로 표현한 것은 그 자체로 장애인 인권을 침해했다는 것이다. 저자를 설명을 듣고 나서야 비로소 이 영화가 불편하게 느껴졌다. 김두식은 이런 불편을 느끼는 것이 인권감수성의 출발이라고 말한다. 멀리 떨어진 대상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에 가까이 다가감으로써 불편함을 느끼는 것 자체가 공포․적대감을 없애기 위한 한 과정이라는 것이다.

 

다만 영화 ‘오아시스’를 ‘철저하게 남성적인, 철저하게 비장애인의 시선’으로 만들었다는 저자의 비판은 오히려 현실을 제대로 바라보고 있지 않는 것 같아 아쉬웠다. 저자는 영화 ‘오아시스’가 사회의 편견 때문에 공주와 종두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처럼 그리고 있다고 말한다. 사회의 편견 때문에 그들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시각 자체가 편견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뇌성마비 장애인인 공주가 편지 하나를 쓰려고 해도 도움이 필요한 것이 현실이고, 도움을 줄 수 있는 인물이 없는 것도 현실이다. 종두 역시 마찬가지다. 전과가 있는 종두가 뇌성마비 장애인인 공주와 동의하에 성관계를 맺었다는 것을 입증할 방법이 없다. 그의 주장을 온전히 믿어줄 상황이 아니라는 말이다. 오히려 영화 오아시스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현실을 더 정확히 묘사한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