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영국 구현을 위한 공공-시장 부문의 경쟁적 공존

[기고] 디지털 영국 구현을 위한 공공-시장 부문의 경쟁적 공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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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은 1980년대에서 1990년대에 걸쳐 주파수·플랫폼 자유화, 전화망 개방(Local Loop Unbundling), 방송의 디지털 전환과 주파수 재분배(digital dividend) 정책 등을 통해 미디어 컨버전스 현실을 반영하고 더욱 진척시켰다. 여기서 BSkyB, 버진 미디어, BT 및 다양한 이동통신사업자 등 새로운 수익을 찾아 나선 시장·산업 부문이 미디어 컨버전스의 주된 행위자로서 기능했다. 하지만 단순히 시장 주도적인 방식으로만 영국의 미디어 컨버전스가 확대됐던 것은 아니다. 디지털화를 향한 정부의 목적의식적 노력과 지원, 그리고 특히 시장 부문의 실패를 보완하고 적절한 위기감수와 혁신을 통해 질적 경쟁을 가능하게 했던 BBC와 같은 공공부문의 역할이 뚜렷했다는 사실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처럼 시장과 산업 부문의 활력이 공공 부문의 공익적 기능과 창의적 경쟁 유발 기능에 의해 보완되는 조화로운 경로를 좇아 영국의 미디어 컨버전스 환경이 확대되어 왔음을 관찰할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시장 주체와 공공 주체 사이에 일정한 대립과 갈등, 그리고 부분적 정책 실패와 그에 따른 컨버전스 지체 현상이 발생했던 것 역시 사실이다. 그러나 영국 정부와 미디어 규제 기구는 다양한 갈등을 조절하고 위험 요인을 흡수함으로써, 공공부문을 추동하여 시장의 방향성을 잡아주는 균형자 역할을 비교적 충실하게 담당해왔다. 1980년대의 대처-보수당 정부에서 2000년대의 신노동당 정부에 걸쳐 비교적 안정적이고 일관된 방향으로 미디어 정책을 추진해온 것이 그 배경이 됐다. 세계에서 가장 먼저 디지털 방송을 전면화시킨 1996년 방송법, 통합적 주파수 관리와 수평규제를 근간으로 하는 정책 기초와 컨버전스 규제 기관 오프콤을 만들어낸 2003년 커뮤니케이션법, 그리고 미디어 컨버전스 환경을 새로운 성장 기반으로 한층 업그레이드시키고자 하는 2010년 디지털경제법이 각각 영국 미디어 컨버전스 정책의 주요 분기점으로서 기능했다.

이와 같은 영국 미디어 컨버전스 사례를 통해 우리는 몇 가지 정책적 참고사항을 발견할 수 있다. 우선, 미디어 컨버전스 이해당사자간 합의와 협력을 도출하는 정책 형성 및 집행 과정에서 민주성과 효율성을 동시에 확보할 필요가 있다. 주기적 실태조사에서부터 시작하여 정책 과제 구성, 전략적 보고서 발간, 법안 구성, 법제화 및 규제 기구 재구성 등으로 이어지는 정책 사이클이 포괄적이고 안정적으로 진행되는 것이 그 핵심이다. 현황에 대한 ‘공통의 인식 기반’을 마련하는 주기적 실태조사, 이해당사자들 사이의 ‘공동 이해’를 구축하는 ‘정책 과제의 우선순위’ 도출, 그리고 최종적인 의사 결정에 이르는 협의과정을 명확히 제도화함으로써, 이해당사자들의 참여를 이끌어내고 정책의 명료성과 추진력을 획득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음으로, 공공과 시장 부문의 경쟁적 공존을 가능케 하는 선순환적 생태계를 구축해야 한다. 예컨대 BBC와 같은 공공부문의 위험감수적 행위는 시장과는 다른 형태의 혁신을 촉발함은 물론 콘텐츠와 서비스 측면에서 일종의 ‘품질 가이드라인’을 제시한다. 반대로 BSkyB와 같은 유료시장의 산업주체들은 주로 기술과 서비스 차원의 선도효과를 유발함으로써 공공부문이 제공하는 무료 보편적인 미디어 공공서비스와는 구분되는 상위시장을 형성한다.

셋째, 영국은 콘텐츠 부문의 기반 경쟁력을 확대하는 한편 서비스 다양성과 유연성을 향상시키는 쪽에 초점을 맞췄다. 요컨대 신문과 방송 등의 전통매체들이 탄탄하게 구축해 놓은 콘텐츠 경쟁력과 신규 미디어 서비스의 다채로움을 통해 기기와 인프라 측면에서의 약점을 보완하는 전략을 취한 셈이다. 최근의 디지털경제법은 컨버전스 인프라의 대대적인 업그레이드를 위해 ‘적극적 산업정책’을 동원하는 한편, 디지털 교육과 훈련을 강화함으로써 이른바 ‘창의산업’의 기반을 튼튼할 목적을 띠고 있다. 한국과 같이 기술·기기 주도적인 컨버전스에 매진하는 방식도 중요하지만, 영국과 같은 콘텐츠·서비스 주도적인 컨버전스 역시 대단히 큰 의미를 갖고 있으며, 이들 사이의 적절한 균형을 수립할 필요가 있다.

넷째, 영국의 컨버전스는 특정 기술에 대한 선험적인 판단에 바탕을 둔 선택적 지원이 아니라, 다양한 기술이나 기기가 시장의 압력을 견디면서 부각되는 과정을 중시한다. 초기 디지털 지상파 정책의 실패 경험이라든가 디지털 라디오방송(DAB), 3G, 스마트폰, 고화질방송, IPTV, 모바일방송, 3DTV 등에 관련된 정책에서도 이와 같은 요소가 견지된다. 특정 기술·기기가 단지 ‘새롭다’는 이유로 성급하게 정책적인 조명을 받거나 국가 재원의 낭비를 초래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시장과 소비자 선택에 의해 ‘생존가능성’을 입증 받은 기술·기기가 자연스레 부상하여 적절한 서비스와 결합함으로써 수익성을 갖춘 산업으로 자리 잡고, 적정 경쟁을 통해 가격 현실화가 성취되면서 소비자 선택이 증가하는 과정이 전제된다. 영국 정부와 규제 기관은 시장의 검증을 거쳐 옥석이 가려진 기술과 기기에 대해 ‘필요 시점’에 개입하여 규제나 진흥 원칙을 마련하는 것을 중시한다.

마지막으로, 공공 부문의 안정성과 경쟁력을 활용하여 산업적 기초를 튼튼히 하는 지원 방식을 채택하고 있는 점이다. 예컨대, BBC는 수신료 재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하여 BBC 온라인, 프리뷰, 프리샛, iPlayer 등의 신규 서비스를 개발함으로써, 시장에 대한 적절한 자극과 대안을 제시했다. 이는 범지상파방송이 기존의 공공서비스 ‘방송’을 넘어 공공서비스 ‘미디어’로서 재정립해 가는 기초가 됐다. 또한 디지털 영국이나 창의적 영국 정책이 무엇보다도 역점을 둔 것은 ‘기능’과 ‘인력’을 육성하기 위한 교육, 훈련, 연구개발에 대한 투자였다. 단순히 정책 정당화를 위한 연구용역에 재원을 낭비하거나 시장 행위자에게 기술 개발비를 제공하고 실효성 있는 결과는 이끌어내지 못하는 진흥 정책이 아닌, 새로운 시대에 필요한 기능과 인력을 계발하고 적시에 공급하기 위한 장기적 시야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는 점을 빼놓을 수 없다.

한국은 미디어 컨버전스에서 상당한 이니셔티브를 구축한 나라임에는 분명하다. 그리고 사회문화적 배경과 역사적 맥락이 다른 사례를 막연히 ‘선진국’의 것으로 이상화하는 태도는 더 이상 바람직하지 않다. 그럼에도 영국 사례와 같은 거울을 통해 한국의 기존 경로를 성찰하는 접근법은 여전히 유효하다. 기술, 기기, 망은 미디어 컨버전스의 필요조건이긴 하나 결코 충분조건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