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BS 기술기획팀 조경환
디지털… 좀 더 빨리, 좀 더 편히, 그리고 지금보다 더 많이. ‘지금보다 더’ 를 위해 태어나 지금 이 순간도 쉬지 않고 더 빠른 속도로 진화의 진화를 거듭해가고 있는 광고 속 어느 할머니의 귀에 들리던 일명 돼지털.
부모님이 큰 맘 먹고 새로 장만한 금성 14인치 컬러텔레비전으로 ‘톰소여의 모험’을 보았을 때의 그 달콤하고 신선한 충격을 잊지 못하던 소년(나)은 30년이 채 지나 않은 지금, 본격 디지털 방송 시대를 준비하고 있다. 아마도 사람들은 지난 시절 컬러텔레비전의 매력만큼 디지털 방송이 주는 변화를 실감하지 못할 것이다. 이미 우리는 다양하고 빠르고 간편한 디지털환경에 익숙해져 있기에 디지털방송의 변화를 몸과 마음으로 급격히 체감하긴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런데 DIGITAL, 참 가깝고도 멀다. 내겐 디지털이 그렇다. 마냥 게으르고 느려터진 내 성격 탓인지 쉽게 친해지질 않는다.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마음이 없진 않지만 적응이 쉽지않다. 그래서인지 내 주위는 적당히 디지털과 아날로그가 혼재 되어 있다. 디지털과 아날로그 세대를 두루 거친 탓인지 아직도 몸에 남아 있는 아날로그적 습성들이 익숙하고 오히려 마음 편하다. 딱딱하고 무거운 등껍질을 지고 느릿느릿 기어가는 거북이 마냥, 나또한 이 디지털이라는 녀석을 등에 지고 동거하며 살아야할 신세인데도 말이다. 물론 거북이는 안전을 위해서고 난 밥벌이를 위해서지만… 그래서 거북이도 나도 과감히 등껍질을 떼어내지 못한다. 여전히 적응이 안 되니 디지털이 나에겐 영 거북(이)스럽다.
방송에 디지털이 더해지면 번쩍번쩍 차가운 광이 날 것 같은데, 그 속내는 과거 아날로그를 그리워하고 느림의 미학을 배우는 비교적 인간적 모양새다. 첨단 디지털방송이 외려 기다림으로 빚어내는 된장과 막걸리를 예찬하고, 놀멍 쉬멍하며 제주도 올레길을 천천히 걸어간다. 그리고 북극서 녹아내리는 빙하를 보며 북극곰이 잃어버릴지도 모를 삶의 터전을 안타까워하며 가슴이 따뜻한 사람들의 휴먼스토리에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린다. 형식은 디지털을 취하되 그 속은 한없이 정을 그리워하는…
그나마 위안이 되고 말이 통할 것도 같다. 그래도 왠지 2% 부족하다.
몇 해 전 바다와 산이 있는 가까운 섬으로 이사했다. 도시냄새가 덜 나서 좋았다. 놀멍 쉬멍 걸으멍 갈수 있는 바다가 옆에 있어 좋았고 고즈넉한 천년 사찰을 품고 있는 산도 있어 좋았다. 우리 가족은 눈이 오면 눈이 오는대로, 비가 오면 비가 오는대로 날이 화창하면 화창한대로 텐트와 버너, 침낭 등을 짊어지고 나들이를 떠난다. 나와 쌍둥이 아들은 자연을 정원 삼아 오늘 밤 우리 집이 되어줄 텐트를 완성하고, 여기저기 떨어진 장작을 주워 모은다. 아이 엄마는 모닥불 앞에 앉아 간소한 식사를 준비하며 라디오서 나오는 7080음악을 듣는다. 실제로 하늘에 촘촘히 박혀있는 북두칠성과 북극성을 하염없이 바라보게 되는 깊은 밤, 타들어 가는 빨간 숯을 바라보면서 천천히 1박2일, 때론 2박3일 휴일을 즐긴다. 이렇게 우린 한 달에 2번 정도 산으로 바다로 강으로 우리만의 별장을 짓는다. 이렇게 자연과 친해지니 별이 하얗게 쏟아지는 숲속에 손수 오두막집을 짓고 오래도록 머물고 싶어지기도 한다. 내친김에 나무 만지는 목공기술을 배우려고 여기저기 기웃거렸다. 톱도 사고 대패도 사고 망치도 샀다. 게으른 목수가 공구 욕심은 끝도 없다. 대신 아이들 초등학교 입학 기념으로 책장과 침대를 만들기로 약속했다. 제재소에서 통나무를 직접 고르고 켜서 앞마당에 한 트럭 쌓아놓는다. 기가 찬 아이들 엄마가 언제 침대가 나오냐며 자꾸 보챈다. 나는 세상에 하나뿐인 침대가 그리 쉽게 나오겠냐며 세월아 네월아, 대팻날을 간다. 그놈의 게으름 탓에 1년이 지나서야 집에 들일 수 있었다. 오랜 기다림 끝인지, 가족 모두가 아빠가 직접 만든 책장과 침대를 세상 어느 것보다 멋지다고 생각하니 흐뭇하다. 근데 숲속 오두막은 언제 지으려나. 대신, 기다란 앉은뱅이 탁자 하나 만들어 마루에 놓았다. 온가족이 둘러 앉아 책도 읽고 그림 좋아하는 아이들이 마음 놓고 그림 그리고, 맥주마시며 영화 한 편 보기에 딱이다. 또 안개 자욱한 밤이면 닦아봐야 지글거리는 “해바라기1집”을 턴테이블에 올리고 탁자 앞에 앉아 막걸리 한잔 따른다. 가끔 LP를 모으러 고물상에 들락거리지만 오디오 매니아도 전문가도 아니다. 그냥 이런 거친 음악이 친근하고 마음이 편안하다. 친구녀석이 이민가면서 주고 간 "돈맥클린의 빈센트"를 들으면 아련한게 술맛이 더 난다. “산너머 조붓한 오솔길에 봄이 찾아 온다네 ~” 막걸리 넉 잔에 다시 "박인희의 봄이 오는 길"이 천천히 돌아간다.
이제, 이곳 바다건너 섬에도 하얀 새 옷 입고 분홍신 갈아 신고 봄이 올 것이다. 그러면 난 창고에서 삽과 호미를 꺼내고 아이들과 장화를 신을 것이다. 집 근처 텃밭에는 지난해 추수의 흔적이 아직 남아있다. 겨우내 얼었던 땅을 갈고 아이들과 종묘가게에서 직접 씨앗과 모종을 고를 것이다. 올해는 토마토와 오이를 좀 더 심어야 겠다. 상추와 고추와 쑥갓… 한여름 된장과 함께 저녁상에 오를 풋풋한 한상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마음이 싱싱해진다.
디지털 환경이 너무나 빨리 변해서 정신이 없지만, 이런 아날로그적 일상이 나의 위안이요, 나를 버티게 해주는 힘이 되는 것 같다.
무거운 등껍질을 지고 가는 거북이를 채찍으로 보챈다고 느릿하던 거북이가 바로 뛸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도 그런 거북이가 200년을 산단다. 시속 200Km의 디지털 거북이, 과연 몇 년을 살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