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은, 아무나 하나

[이종화 컬럼] 방송은, 아무나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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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 거대 통신사업자의 행보를 보고 ‘사랑은 아무나 하나, 어느 누가 쉽다고 했나…’ 라는 노래말에서 제목을 따 보았다.

거슬러 올라가보면 2007년 말 거의 밀어내기식으로 국회를 통과한 IPTV 특별법에 따라 IPTV 사업자들은 방송사업자로 법적 지위를 확보하게 되었다. 다르게 말하자면 방송을 ‘사랑’할 법적 자격을 얻게 된 것이다. 이제 대 놓고 방송의 철학을 실천하고 방송콘텐츠를 창출하여 널리 보급함으로써 국민의 삶을 질을 높이는데 이바지할 방송의 새로운 식구가 된 것이다.

IPTV를 꿈꾼 통신사업자들은 법적 자격을 획득하기 전부터 크던 작던 방송의 새 식구가 될 준비를 나름대로 해왔다. 이를테면 2005년 KT는 국내 최대 영화제작사인 싸이더스F&H의 주식 51%를 인수하여 콘텐츠 확보에 나섰고 이듬해엔 국내 최대 방송콘텐츠기업인 올리브나인에 지분투자를 하면서 콘텐츠 사업진출을 본격화했다. SKT도 영화음반기획사인 IHQ 지분을 인수하고 YTN 미디어의 지분을 인수하는 등 투자를 통한 ‘콘텐츠 사랑’에 여념이 없었다. 그런 투자가 한국 영화에도 일정부분 도움이 되었을 것이지만, 지상파방송사 등 기존 콘텐츠 사업자들의 영역을 침범하기 때문에 갈등의 소지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IPTV사업이 생각보다 부진한데다가 뜻대로 안되었는지 KT는 지난 달, 콘텐츠사업 전략을 대폭 손질한다며 올리브나인 주식과 경영권을 모두 아윌패스라는 회사에 넘겼다는 것이다. KT가 콘텐츠 육성을 위한 제작보다는 콘텐츠 유통을 위한 배급에 역점을 두기로 전략을 수정한 것으로 보이는 이 사건은, 단편적이기는 하지만 우리나라 IPTV 사업자들의 전략의 깊이를 보는 것 같아 아쉬울 뿐이다.

 

그런 관점에서 IPTV World Forum 2008에서 Tandberg Television 부사장의 기조연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는 IPTV사업자가 단순한 TPS 사업자를 뛰어넘어 ‘televisionary’가 되어야한다며 IPTV사업자의 마인드 변화가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즉, TPS 결합상품의 공격적인 가격 인하로 어느 정도 가입자 확보에는 도움이 되겠지만 지속적으로 그렇게 하기는 힘들 것이며, 소비자들이 다양한 플랫폼을 통한 새로운 서비스를 갈망하기 때문에 서비스와 컨버전스의 미래 비전을 보여주는 ‘televisionary’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가장 성공적인 컨버전스 사업모델은 가입자 획득과 유지뿐만 아니라, 부가가치가 높은 서비스 발굴을 통해 새로운 수익을 창출하는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IPTV 사업의 핵심은 바로 이러한 새로운 수익 서비스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한다고 역설한 것이다. 정리하자면 새로운 수익을 찾는 새로운 방송사업자가 되기를 힘쓰라는 뜻이리라.

TPS를 통해 가격경쟁이 치열해질수록 IPTV 본연의 서비스 경쟁보다는 기존의 초고속인터넷 서비스 가격만 낮추어 소비자들에게 어필하려고 할 가능성이 우려되며, 따라서 통신사업자의 수익구조가 열악해질 수 있고, 콘텐츠 권리를 확보하지 않은 상태에서의 IPTV 사업은 자칫 독이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TPS에 의존하면 잠시 IPTV의 강자가 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통신 사업 자체의 수익성을 나쁘게 하면서 IPTV 사업 진출을 후회하게 만들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볼 때, 그간 IPTV사업자들이 벌여온 콘텐츠 권리 확보와 공유를 위한 노력이 후퇴되거나 다른 방향을 지향한다면 IPTV 사업에도 장기적으로 유리하지 않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단지 이 사건 하나로 단정할 수도 없고, 방송사에 대응하여 경쟁력을 갖기 위해 노력하다가 불가피하게 내린 사업적 판단을 비판할 수 없지만, 우리나라 방송콘텐츠 발전과 IPTV의 미래에 끼치는 영향까지 생각한다면 아쉬운 부분이 있다.

특히 KT는 올리브나인을 인수하면서 신개념 IPTV 콘텐츠를 만들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내놓고 실행에 옮기는 모습을 보였었는데, 경영진이 바뀌고 나서 그런 노력도 접는 것이 아닌가 싶어 안타깝다.

그 ‘신개념 IPTV 콘텐츠’라는 것은 사실 영국의 BT 주축으로 EU차원에서 추진하는 NM-2(New Media-2)라는 IPTV용 양방향 콘텐츠 개발 프로젝트와 유사한 것인데, IPTV 양방향성을 이용해 보다 구체적이고 다양하게 시청자 선택형 프로그램이 가능함을 보여주기 위한 대표적 사례이다. BT와 마찬가지로 KT도 싸이더스, 올리브나인 등을 통해 선택형 스토리를 핵심으로 하는 추리 드라마 ‘스토리 오브 와인’을 제작하여 양방향 드라마를 선보일 생각이었다. 이른바 IPTV의 콘텐츠 차별화에 대한 의욕과 노력의 일단을 보여준 것이었다.

물론 BT은 NM-2나 KT의 이런 노력이 무조건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다. 제작자가 양방향 콘텐츠를 어떻게 받아들이며, 제작비 상승부분이 추가적인 수익과 어떤 관계를 가질 것인지도 불투명하기 때문에 풀어야 할 숙제가 많다. 그러나 새로운 시도를 할 사업자가 사라진다는 것은 IT 강국을 넘어서서 콘텐츠 강국을 같이 지향해야 미래 IT 시장에서의 경쟁력을 계속 유지 발전시켜나갈 수 있다는 관점에서 아쉬운 대목이다.

 

잘 알려진대로 IPTV 특별법을 논하기 전부터 심하게 대립해온 갈등이, 작년 말 핵심쟁점인 지상파TV 실시간 재전송 문제를 전격 합의하면서 어느 정도 진정이 되는가 싶었다. 그러나 IPTV 실적 저조와 함께 또다시 벌어지는 양 진영의 갈등을 보면서, IPTV를 어떤 철학에서 이끌어가야 하는지에 대한 공감대가 아직 충분하지 않으며 신뢰를 지키는데 소홀하다는 생각을 금할 길 없다.

또한 방송이 과거 20세기 중후반 시대처럼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더 이상 아니라는 사실을 간과했다고 지적하고 싶다. ‘방송’이란 두 글자가 청소년들을 빠져들게 하는 마력이 있는지 몰라도 사업자에게까지 그런 마력을 보여주고 지속시켜주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무릇 투자라는 것이 미래 성장 가치를 두고 진행되어야 하지만, 나 혼자만이 그 미래를 독식할 수 있다는 오만과 편견에서 출발하였다면 그런 매력이 무조건 마력을 발휘하게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독식보다는 기존 콘텐츠 사업자와 상생 노력을 더 기울이면서 콘텐츠의 새로운 지평을 같이 열어가고자 하는 측면에서 ‘콘텐츠 펀드’ 조성 노력의 타당성과 필요성이 강조되는 것이다.

 

‘방송’은 그 글자가 주는 의미대로 불특정다수에게 편견없이 콘텐츠를 제작하고 전달하는 공공의 역할을 갖는다. 물론 방송의 틀이 진화하면서 개인형 방송이니 맞춤형 방송이니 하는 용어처럼 방송소비자의 새로운 욕구에 부응하려는 노력도 있지만 큰 틀에서 ‘방송’의 철학을 깨지 않는다는 전제가 있다. 이를테면 공공 서비스로서 마땅한 것이어야 한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특정 소비층을 대상으로 치밀한 판매전략을 펼치면서 고객지향이라는 포장 밑에서 수익을 지향하는 철학을 가진 사업자들에게 그런 ‘방송’을 주문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주문을 거둬들이기에 법률과 정책과 시간이 이미 너무 앞서 가버렸다. 그저 혼잣말로 ‘방송은 아무나 하나’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 필자 주 : 이 글은 KBS의 공식 입장이 아닌 필자의 개인적 견해임을 밝힙니다.

 

(이종화, KBS 방송기술연구소, 공학박사)